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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당신은 공범입니다.

25년7월22일의 기록

by 길고영

1화에서 계속...


그는 말했다.

“화면에 보이는 세 장의 서류를 사진으로 저장한 뒤, 조용히 통화할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해 주세요.”


기소 내용에 대한 진술을 받아야 한다면서,

통화 중 제삼자의 목소리가 들리면 진술 자체가 무효가 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사건’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주범 김OO.

서울 OO오피스텔에서 성매매를 알선했고,

총 180명이 연루되었으며, 피해액은 80억 원에 달하는 사건이란다.

그중 내 명의로 개설된 대포통장에서 2,300만 원의 피해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은 현재 조사 대상입니다. 본인의 무죄는 본인이 입증하셔야 합니다.”


왜 그땐 몰랐을까.
수없이 들어왔던 ‘무죄추정의 원칙’을,
왜 그 순간엔 떠올리지 못했을까.

지금에서야, 뒤늦은 후회를 해본다.


이어 2019년, 6년 전의 행적을 캐물었다.

서울에 간 적이 있는지, 김OO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은 없는지,

누군가에게 통장을 빌려준 적은 없는지, 주민등록증이나 휴대폰을 분실한 적은 없는지.

광명시 우리은행 철산지점에서 통장을 개설한적이 있는지.


그리고 덧붙였다.

“지금부터의 대답은 ‘진술의 시작’입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없으면 없다고 하세요. 나중에 틀리면 곤란해집니다.”

현기증이 났다.


잠시 후 그는 말했다.

“자산 현황도 파악해야 합니다. 계좌번호나 비밀번호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

금융기관명과 예치 금액만 10만 원 단위로 말씀해 주세요.”

그리고 주의를 줬다.

“가끔 계좌번호와 비밀번호까지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녹취에 개인정보가 남으면 그건 무효가 됩니다. 조심하세요.”


나는 겁에 질린 채, 생각나는 대로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누락된 게 생각날 때마다 다시 보탰다.


그는 내 주장에 대한 녹취가 끝났다며,

“검사님이 직접 통화하시고 싶다고 하시니 기다리세요.”한다.


검사와 통화하게 되면 연결음이 들릴 거라 예상했지만,

곧바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조금은 더 강압적인 톤의 남자 목소리였다.

사무실 전화였다면, 전화를 다른 자리로 돌리는 장면이 자연스레 떠올랐겠지만,

당황한 나는 별 의심 없이 통화를 이어갔다.


검사의 이름이 소장에 없어 되물었다.

그는 말했다.

“담당 검사라 이름이 누락된 겁니다.

180명 모두에게 개별 검사가 배정돼 있어요.”


검사는 내게 말했다.

“사건번호, 이름, 생년월일 말씀해 보세요.

왜 약식기소되었는지도 직접 설명해 보시고요.”

나는 머릿속을 더듬으며 천천히 말했다.


나의 진술 내용을 바로 잡아 다시 설명하던 그가 소장의 첫 장을 보라고 한다.

“문서 첫 장의 ‘고지 내용’을 읽어보세요.”

마치 미란다 원칙처럼 보였다.


1번부터 5번까지 차례로 읽어 내려갔다.

5번까지 읽고, 머뭇거리자 그는 지시를 덧붙였다.

“5번 항목의 하위 조항, ㄱ부터 ㄹ까지도 읽어주세요.

그리고 4번은 중요하니까 한 번 더 읽어주시고요.”


그는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말투로 지시를 이어갔다.

순간, 진짜 검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며

그의 말에 신빙성이 더해졌다.


그는 내 직장명과 연봉, 4대 보험 가입 여부, 정규직 여부를 물었다.

그리고 도박 경험 여부도 물었다.


“도박 빚이나 생활고에 의한 범죄 혐의가 없어서 다행입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내 무죄가 입증된 것만 같아 안도했다.


매일 저녁 듣던 김복준 형사의 사건 속으로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사건을 집요하게 파헤치던 형사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선 건 과거의 나,

혹시라도 잘못한 게 있다면 내 탓이라는,

어릴 적부터 배어 있던 그 생각뿐이었다.


아직 혐의가 입증되지도 않았는데,

형사가 아닌 검사와,

그것도 처음으로 심문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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