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밤이 있는 한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없지, 아무렴.
너와 나의 술자리가 익숙했다. 어떠한 안주와 술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어떠한 이야기들이 흘러갈지 어느 정도쯤 우리의 술자리가 마무리되어야 하는지 너무나도 익숙했다. 생각하고 신경 쓰지 않아도 술자리의 시간은 자연스럽게 흘렀다. 편안하지만 조금 진부하게. 그렇게 그날의 술자리도 마무리되었다. 약간의 취기와 함께 돌아오던 골목길에 문득 우리의 불편했던 첫 술자리가 떠올랐다. 이제는 전혀 느낄 수 없을 그 첫 술자리. 그 불편하고도 이상하게 설레던 그 첫 느낌.
술집을 정하는 것부터가 너와 나에겐 큰 문제였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내가 가고 싶던 그곳보단 상대의 취향을 맞추어 주는 것이 훨씬 더 먼저였으니, 우린 둘 다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다. 너는 남자라는 입장에 놓여 어디론가 나를 리드하고 싶으면서도 내가 마음에 드는 곳으로 골라야 했으니 그것으로 진땀을 흘렸을 테고 나 또한 어디를 가든 내 마음에 꼭 들어 네가 리드한 보람을 느끼게 해야만 했으니, 그래야 그 만남은 예의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을 테니까.
그렇게 너와 처음으로 들어갔던 꽤나 고급스럽고, 안주가 쥐꼬리만큼 나오던 선술집. 머릿속으로 술과 안주의 가격을 단골 닭발집의 가격과 계속 비교하게 만들었던 그곳. 넌 늘 오던 술집이라는 듯 내 의사를 물어가며 거만해 보이지 않도록 안주를 공손하게 시켰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모습이 나는 꽤 마음에 들었고 - 내가 기억하는 네 모습 중에 주문하던 그 선량한 말투가 남아있는 걸 보면 말이지 – 술을 잘 마시냐는 너의 물음에 지금도 소름 돋는 대답이지만 맥주 한두 잔 정도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그때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니 무심함이 고마울 정도로 소름 돋는 대답이었다. 주문을 하고 난 후 어색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우리는 불필요한 대화들로 가득 채워야 했다. 그때 네가 떨었던 약간의 허세가 고맙게 느껴졌다. 그 이야기들이 어색한 그 틈을 잘 메워주었으니, 손으로 입을 가려대며 하하호호 웃어대던 내가 몸서리치게 싫었지만 지금 네가 늘어놓는 농도 짙은 저렴한 농담을 들을 때면 가끔 그때가 그리울 때가 있기도 하고.
한잔 두 잔 들어가는 술잔에 그 설렘과 어색함은 점점 사라지고 어느새 편안해지고 있는 우리를 발견할 때쯤 술자리는 끝이 났다. 나를 데려다주겠다며 적극적으로 나서는 네가 싫지 않아 두 번 거절하지 않고 집 앞까지 함께 했고, 무슨 말을 꺼내고 싶은지 쭈뼛거리는 너를 보다가 입맞춤을 해버렸다. 나는 그날이 실수였다고 매일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날 무엇엔가 홀린 듯 밤을 함께 보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술은 내 주량에 비하면 간에 기별도 가지 않게 마셨으며 네가 내 마음에 쏙 든 것도 아니었지만 그냥 그렇게. 후에 사람들은 그런 걸 운명이라고 말했다. – 운명인지 인생 최대의 실수인지 알 수는 없지만 – 그리고 다음날 넌 회사가 마치자마자 내게 만나자는 연락을 했고, 조금 촌스럽지만 기분 나쁘지 않은 고백을 했다. 두 번의 닭발을 사 먹을 수 있는 가격의 장미 꽃다발 한아름과 함께. 그리고 그날 우리는 또 술을 마셨다.
오늘도 여전히 우리는 술잔을 마주하고 앉아있다. 별다른 대화는 없지만 어색하지 않았고 서로에게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먹고 싶은지 등등의 불필요한 질문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소주병은 어느새 네 병쯤, 일어나려는 채비를 하는 나를 붙잡고 오늘은 한 병 더 마시잔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주량을 넘어서고 있는 너, 그리고 그냥 자연스레 한잔 더 받고 있는 나. 입에 닭발 양념을 가득 묻히고 먹고 있는 너와 내가 너무 편안하면서도 그때의 네가 맞는 건지 궁금해지던 찰나에 웃으며 그때 그 술집 처음이었다며 껄껄대고 웃는 너. 알고 있었어. 그래도 애쓰길래 어쩌나 하고 보고 있었지. 내 대답에 또 한 번 껄껄거리며 웃는 네 모습이 오늘따라 너무 편안하게 느껴진다. 소주 한 병은 금세 비워지고 그제야 너는 비틀대는 몸에 힘을 꽉 주며 이제 가자고 나를 일으켜 세운다. 언제나 같이 집으로 향하는 걸음에 그날따라 너는 말이 없었고, 정말 너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집 앞 꽃집으로 성큼성큼 들어가더니 장미 꽃다발을 사고 나와서는 또 말없이 길을 뚜벅뚜벅 걸었다. 그 꽃 나 줄려고 산 거냐고 묻는 질문에도 웃기만 하더니 비틀대며 집 앞에 서서 무슨 할 말이 있는 듯 쭈뼛 거리는 너를 보고 있자니 그때 생각이 나서 피식하고 웃었다. 그런 나를 보더니 툭 하고 꽃다발을 건네주고는 주머니에서 꺼내는 조그마한 상자.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타.’ 반지를 내 손에 끼워주고는 ‘아 이것 때문에 오늘 술이 입으로 들어가는가 코로 들어가는가 모르겠더라.’ 말없이 반지를 만지작 거리고 있는 나를 빤히 보더니 ‘좋나’ 하고 묻는 말에 어떠한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몰라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그 계단에 아무 말 없이 앉아있다 그렇게 헤어졌다. 집으로 들어와 다시금 반지와 꽃다발을 멍하게 쳐다보다 얼른 전화기를 들었지만 마음속에 이상하게 이는 그 감정이 낯설어 또각또각 문자를 보냈다. 고마워. 너는 한참 후에야 집 도착이라는 답장이 왔고, 그리고 한참 후에 또 다른 문자를 보냈다. 전화는 부끄러워서 못하겠다. 이건 술로도 해결이 안 되네. 그날 얼마나 예뻤는 줄 아나 그렇게 예쁜 네가 5일 후면 내 마누라가 된다는 게 꿈인지 생시인지 이 오빠가 다른 건 약속 못해도 평생 니 닭발은 책임 진다. 사랑한다. 잘 자자. 메시지를 한참 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운명.
그리고 문자를 썼다. 오빠는 무슨, 얼른 씻고 자. 잠깐 고민, 평소처럼 썼던 문자를 지웠다. 그리고는 다시 문자를 썼다. 오빠 변함없이 매일 사랑해줘서 고마워. 나도 사랑해 ♥ 처음으로 써보는 나답지 않은 문자를 보내고 나니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이내 바보처럼 활짝 웃는 니 사진이 문자로 도착했다. 그리고 나는 답장을 보냈다. 까불지 말고 씻고 자.
꽃 향기가 가득했다. 술 냄새가 가득했다. 네가 내 마음에 가득했다. 처음 그때처럼.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이 또 한 번 찾아왔다. 취기가 가득 오르는 밤. 술이 함께 한 그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