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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리 Oct 02. 2022

망고스틴, 혹은 망고스틴이 되지 못한 무엇

Writer's block Diary: 3일째


식물을 분양받았다. 우리강산 프로개 프로개라는 블로그에서 나눔 받은 망고스틴 1년생 묘목이다. 녀석을 보다보니, 어김없이 글에 대한 비유가 떠올랐다.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는 과정도, 식물이 자라는 과정과 참 비슷하다고 말이다.


식물은 참으로 효율적인 생장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어서, 자신에게 불리한 환경에 처하면 절대로 싹을 틔우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식물은 발이 없으므로 태어난 자리를 제 힘으로는 절대 바꿀 수 없는 입장이니까. 언젠가 사막에 피어난 꽃밭 사진을 본 적 있다. 수백 수천 년이나 잠들어있던 씨앗이 사막에 비가 내리자 일제히 꽃을 피웠다는데, 진위 여부가 의심스럽기는 해도 참으로 식물다운 에피소드가 아닌가 싶었다.


글 역시도 마찬가지다.


작가가 고르고 고른 아이디어라는 씨앗을 땅에 심으면, 어느날 새싹이 머리를 내민다. 물론 내밀지 않고 그대로 잠들어버리는 씨앗도 있고, 십 년도 전에 심어두고 잊어버린 무엇인가가 짜잔! 하고 나타나는 일도 벌어지기는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글은, 대체로 작가의 의도에 따라서 가지를 뻗고 뿌리를 내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100퍼센트 의도에 맞게 자라는 식물이 없듯, 글도 예측 불가능한 영역이 훨씬 더 많다.


글에서 가장 중요한 건 완성이라고들 한다. 처음을 여는 것보다 끝을 닫는 것이 글에서는 훨씬 어려운 문제라는 건 따로 논의할 필요조차 없겠지만, 내게는 항상 그놈의 '끝'이 문제였다. 나는 어느 글이건 잘 끝내지 못했다. 그러지 못했던 건 선택지가 너무 많았고, 선택지 앞에서 늘 선택장애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글은 어느 정도 자라면 갈 수 있는 선택지가 한정지어지는데, 그 분기점에서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점은 글의 향방을 결정짓는다. 모든 것이 다 가능한데 왜 한 군데로만 가야 하는 것인가? 그것이 바로 내 화두였다. 물론 갈 수 있는 모든 길을 다 갈 수는 없다. 상상 속에서라고 할지라도, 글 속에서라 할지라도. 다만 어디서 어떻게 출발 했든간에, 작품이라는 비행선을 만들었다면 탑승객에게 공중을 실컷 떠돌며 재미있는 광경을 보여주었다가도 목적지에 다다르면 그들을 안전하게 착륙시켜 주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을 뿐이다. 시작하기 전부터 목적지가 어딘지 몰랐으므로. 이야기가 이야기로서의 가치를 갖도록 할 자신이 없었으므로.


그래서 아무것도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쓰고 싶은 것이 없으면 쓰지 않기로 다짐했다.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독자를 데불고 굳이 공중으로 떠오를 이유는 없을 것이다. 내겐 그것이 글에 대한 진심이었다. 다짐의 날들이 길어지면서 알 수 없는 공허가 찾아왔다. 어째서? 할 말을 정하지도 못했으면서, 달싹이는 입술은 무슨 의미일까?


분풀이를 하듯 어느 순간부터, 텍스트를 읽기 시작했다.


문학이든 문학이 아닌 것이든 가리지 않고. 오히려 문학이 아닌 쪽이 대하기는 편했다. 부동산, 재테크, 투자에 관한 책을 읽었고 스무 권쯤 넘어가자 경제학으로도 손이 갔다. 생활인으로서 꼭 필요한 정보들이었지만 참 낯설고 거친 영역이기도 했다. 분명히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 돈에 대한 생각을 정립하는 게 필요했는데, 가끔은 감정이라고는 끼어들 틈이 없는 이곳에서 나를 위무할 문학적인 무엇 또한 절실했다. 그래서 또, 소설을 읽고 에세이를 읽었다.


그렇게 올해 읽은 책이 오십 권은 넘어간다. 꼭 글쓰기만을 위해서 시작한 독서는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도피를 위한 독서가 아닌가 생각도 들었다. 읽기 위해 하는 독서가 아니라, 쓰지 않기 위해서 하는 독서는 그러나 얼마나 비참한 것일까?


이렇듯 수많은 의문문의 가지를 뻗치며, 고민의 나무를 한 편 키워냈다. 오늘의 일기는 여기서 마친다. 내일 일은 내일의 나에게 맡겨두자. 어차피 고민은 계속되리라. 내가 쓰려는 사람인 한 분명 그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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