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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리 Oct 06. 2022

너는 작가인가, 작가가 아닌가

Writer's block Diary: 8일째

Photo by Susan Q Yin on Unsplash


아는 작가들이 많다.


잠깐 스쳤거나 건너건너 아는 사이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더욱 많아진다. 그들 중에는 등단한 사람, 책을 낸 사람, 상을 받은 사람, 베스트셀러 상위 랭크에서 내려올 줄을 몰라 날 기억이나 할까 싶은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3년간 룸메이트였던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내가 글을 쓰며 살겠다고 다짐했을 무렵만 해도 아는 작가가 0명이었다.

대략 18년 전의 일이다.


아버지가 한때 드라마에 당선되겠다며 한 편의 원고를 끄적이다 곧 장롱 어딘가에 처박아버린 적이 있지만 그 외 가족, 친인척, 하다못해 동네 사람, 학교 선생님과 친구들, 직장 동료들 중에도 작가가 된 이는 없었다. 따라서 작가란 책과 텔레비전, 신문과 출간 기념 사인회에서나 겨우 접할 수 있는 상상동물과도 같은 존재였다.


지망생일 무렵 나는 아직 작가가 되지 않은 그들, 나와 같은 단계에 놓인 그들이 항상 어디에 꽁꽁 숨어있는지 궁금했다.


그들을 만나서 오래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뭘 썼는지, 왜 썼는지, 또 쓰고 싶은지, 어떻게 쓰는지, 던지고 싶은 질문도 많고 하고 싶은 대답도 참 많았다. 혼자서 해내야 하는 수많은 일들 중에서 글쓰기만 외로운 건 아니겠지만, 작가 지망생이라고 해서 가상의 세계에서 창작된 인물들과만 교류할 수 있도록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테니까.


알고 보니 그들은 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주로 모여 있었다. 대학에 가지 않고 곧장 공무원이 되었던 나로서는 그들이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세계의 범주 바깥에 있었으므로, 설사 창작 아카데미나 강좌 따위에서 마주치는 일이 있더라도 서로를 이해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는데 그런 와중에 눈부시게 발달한 인터넷 덕분에 몇몇 글쓰기 사이트가 생겨나 비로소 전공자가 아닌 평범한, 직업이 있는 분들을 현실 세계에서 만날 수가 있게 되었다. 


이후 한 문학 전문 출판사의 시 창작 강좌를 듣는 것으로 반경은 넓어져 출간 기념 사인회, 낭독회, 신춘문예 당선자들이 언급하곤 했던 문학 수업 등을 거치면서 모난 성격도 점차 둥글어졌고, 그 때문인지 내 주변은 시인, 소설가, 드라마작가 내지는 그들이 되기로 마음 먹은 이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헛소리와 진심, 볼꼴과 못 볼 꼴, 때로는 질투와 변명까지 주고 받으며 우리는 글쓰기라는 거대한 자장 안에서 기꺼이 세월을 보냈다.


어제, 바로 그렇게 알게 된 누군가의 소설을 읽으며 몇 번 감탄과 감동을 맛보다가 끝내 안부 메시지를 보냈다.


작가를 실제로 알고 있는 채로 작품을 읽는 맛, 하루 이틀 일도 아니건만 어쩐지 울컥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어쩌면 이렇게 자기 자신답게도 썼단 말인가. 본인 스스로는 모를지도 모르는, 너무도 그 자신 특유의 성깔과 세계관이 무의식적으로 툭툭 비어져 나와 독자이자 지인인 나는 웃음을 지을 수밖에는 없었다.


그 소설가, C는 나와 같은 강좌에서 단편소설을 쓰던 사람이었다. 한 번도 같은 클래스에 속한 적이 없었지만 뒤풀이에서 이런 저런 한담을 주고 받다가 결국 호형호제, 는 아니고 아무튼 좀 친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누가 먼저였는지 강좌를 더 이상 나가지 않게 되면서 소식이 뜸해졌고 올해 초, C가 어느 메이저 장편소설 공모전에 당선되었음을 알게 되고 축하 인사를 나누었던 게 전부인 사이로 변했긴 하지만. 아무튼 그 등단 소설을 다 읽으면 직접 작가에게 사인 받겠다 큰소리를 쳐놓고는 사느라 바빠서인지 통 읽지를 못하고 있다가 이번에야 제대로 읽기 시작한 터였다.


C가 먼저 물었다.


-잘 지냈어요?

-그럭저럭이요. 잘, 이란 게 좀 어렵잖아요.

-글은 꾸준히 쓰고요?

-두 번을 연타로... 꾸준히, 란 게 좀 어렵잖아요.

-신춘문예 시즌이네요.

-그런가요?

-그렇죠. 몸이 반응을 하는 건지...

-하긴, 지금쯤 쓰거나 다듬어야 제출할 수 있겠네요.


대화는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가로놓였던 시간만큼 다소 어색한 대화, 기억할만한 내용도 아닌 대화를 그러나 오늘 문득 떠올린 것은 일하다 발견한 어떤 책 때문이었다. <쉽게 방전되는 당신을 위한 에너지 사용법(원제: Curating your life)>.


누구나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하는 시대, 우리는 좀 더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하루를 살기 위한 방법을 찾아다닌다. 각종 자기계발서와 유튜브에서 시간 관리 비법을 찾아보며 하루 24시간을 빈틈없이 활용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나 그 방법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에너지가 바닥나 있다면, 시간이 아무리 많은들 무슨 소용일까? 보통의 경우에는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에너지가 없는 것이다. 방법을 바꿔보자. 인생을 획기적으로 바꾸고 싶다면, 이제부터 시간 관리가 아닌 에너지 관리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올해 초만 해도 신춘문예에 소설을 쓰기로 했었다. 제목을 정하고, 뭘 말할지 정해놓았었다. 심지어 몇 문단을 썼다. 더 진행하지 못한 이유는 단지 시간이 모자라서였다. 아니, 정말은 시간이 아니라 에너지가 모자란 거였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지 저쨌든지, C가 신춘문예라는 단어를 꺼내놓기 전까지 나는 그 소설에 대해서 잊고 있었다.


아니, 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독립출판과 웹소설이 지금과 같이 떠오르기 전, 등단은 작가의 거의 유일한 데뷔 경로였고 지금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출판으로 데뷔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장르소설, 에세이, 논픽션에 국한되어 있을 뿐 소위 순문학이라고 하는 계열의 소설을 쓰려는 사람이라면 신문사의 신춘문예나 출판사의 신인 문학상에 선정되어야 바로 등단이라고 하는 문턱을 넘은 신예 작가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묻고 싶다. 한국출판문화진흥원의 데뷔작가 프로그램을 거쳐 출판사에서 책을 내기는 한 나와 같은 작가는 등단을 한 것인가 만 것인가. 한국예술인복지재단으로부터 예술인 패스를 발급받았으니 등단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문화재단의 작가 지원프로그램의 세부요강에 따라 단순히 ISBN이 붙은 책 한 권 달랑 낸 것만으로는 작가로 인정되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렇듯 애매한 위치에 놓인 작가들은 절필하거나, 재등단을 한다.


Writer's block. 작가의 벽에 갇혀버린 나는 절필을 하려고 했다. 절필이란 게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으나, 이번에는 재등단이라는 벽이 나타났고 그것은 더 높고 견고해보였다. 또 안 되겠지. 늘 안 됐잖아. 계속 할 수 있다고 생각하냐? 이번엔 얼마나 갈까? 영화 <버드맨>의 버드맨처럼, 내 속에는 진짜 악랄한 새끼가 깃들어 있어서 그 빈정거림에 HP가 깎이지 않으려면 해도 진작에 절필을 했어야 되지 싶다.


그런데도 뭐라도 쓰지 않으면 돌아버릴 것 같아서 이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했다. 안 써질 때는 안 써진다는 문장이라도 써라! 어디에선지는 몰라도 어딘가에서 읽은 문장을 동앗줄처럼 부여잡는 심정으로.


오늘로 이 다이어리를 쓴 지 8일째, 효험이 있는 것일까. 소리가 들린다, 마음의 소리가. 쓸데없는 짓은 모조리 그만두고 쓰려던 그 글에 집중하는 게 어떨까? 나는 알고 있었다. 꾸준히 쓰지 못해서 잘 지내지 못했다는 것을. 결코 잘 지내지 못해서 꾸준히 쓰지 못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완성할 수 있을까?

오늘 그 문장의 뒤를 이어, 몇 자라도 쓸 수 있을까?


스멀스멀 안개처럼 내깔리기 시작한 다짐이 무엇이 될지, 그러나 쓰기 전엔 답을 구할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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