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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리 Oct 05. 2022

I loved RANGE!

Writer's block Diary: 7일째

@Range, https://www.amazon.ca/Range-Generalists-Triumph-Specialized-World/dp/0735214484


재능과 그 향상법을 연구한 책들을 항상 흥미롭다고 생각해왔다. 


올해 읽은 논픽션 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책은, 레인지Range이다. 국내 출간본의 제목은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 전문화된 세상에서 늦깎이 제너럴리스트가 성공하는 이유라는 부제를 달고 나왔다. 거창한 타이틀이 주는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꽉 찬 내용은 <탤런트 코드>, <아웃라이어>, <크리에이티브 커브(한국어판 제목: 생각이 돈이 되는 순간)>만큼이나 흥미로웠다.


원서의 표지에 "I loved RANGE."라고 말한 사람은 뜻밖에도 말콤 글래드웰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만 시간의 법칙으로 유명해진, 인문 사회학계의 거성. 그런데 이 책, 레인지는 말콤이 제시한 바로 그러한 법칙-한 우물을 오래 파면 어느 순간 포텐이 터진다! 내지는 그릿(Grit)이 많은, 꾸준한 거북이가 결국 승리한다!-을 근원적으로 의심하는 데서 출발한다.


저자인 데이비드 엡스타인은, 세상에는 한 우물만 파도 되는 분야가 있고 그렇지 못한 분야가 있어서 이를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만 시간의 법칙이 통하는 데가 있고 아닌 데가 있다는 것이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테마다.


클라인이 연구한 영역들, 즉 본능적인 패턴 인식이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영역들은 심리학자 로빈 호가스(Robin Hogarth)가 친절한 학습 환경이라고 부르는 것에 속한다. 그런 환경에서는 동일한 패턴이 계속 되풀이해 나타나고, 피드백이 극도로 정확하고 대개 아주 빨리 이루어진다. 골프나 체스에서는 정해진 공간 내에서 규칙에 따라 공이나 말을 움직인다. 그리고 결과가 금방 드러나고, 비슷한 도전 과제들이 되풀이해 나타난다.
카너먼은 친절한 학습 환경의 뒷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호가스는 그쪽을 사악한 환경이라고 했다. 사악한 분야에서는 게임의 규칙이 불분명하거나 불완전할 때가 많으며, 반복되는 패턴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으며, 아예 있는지조차 명백하지 않을 때도 있고, 피드백이 늦어지거나 부정확하거나 양쪽 다일 때도 많다. 가장 지독히도 사악한 학습 환경에서는 경험이 오히려 잘못된 행동을 강화하는 형태로 학습이 이루어질 것이다.


누적된 노력이라는 성공 신화를 맹신하는 건 옳지 못하다, 전문가가 되면 될수록 시야가 좁아지는 위험이 가중될 수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한길만 파는 것이 한눈을 파는 것보다 더 못할 수도 있다니. 하긴, 많은 시간을 두고 실수를 하고 이를 수정하며 배워나가야 몸에 익는 일이 세상에는 더 많을지도 모르니까. 특히나 급변하는 환경, 스포츠와 창작의 영역에서는 더욱 그렇지 않을까?


반 고흐, 닌텐도, 수학 수업, 나사NASA의 사고, 폴 그레이엄(Paul Graham)의 낭독되지 않은 졸업식 축사, 하워드 핀스터(Howard Finster)의 그림. 저자는 느릿느릿하고 비뚤비뚤한 학습으로 인한 성취의 사례들을 끝도 없이 제시한다. 그 풍부한 사례들은 나름대로의 근거와 울림을 가지고 있어서, 읽는 동안 어쩐지 계속해서 격려 받는 느낌이 든다.


「가장 위대한 음악가들 중 일부가 독학으로 음악을 터득하고 악보 읽는 법을 전혀 배우지 못한 이들이라니 좀 기이하죠.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지금 재즈를 가르치는 학교들에서 많은 학생들이 배출되고 있는데, 그들의 음악을 들으면 모두 똑같아요. 나름의 소리를 찾으려는 것 같지가 않아요. 색다른 장소에서 똑같은 소리를 찾으려고 애쓰면서, 더 많은 실험을 해보며 독학을 할 때 문제 푸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닐까요?」


수많은 작법서를 보며, 문예창작학과 출신의 글을 보며, 내가 느꼈던 감정도 위와 같았다. 스스로 발견한 공식이 아니라, 이미 확정되어 있는 세상의 공식에서부터 출발하는 건 한 가지 방편일 뿐, 그게 방편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음악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다, 어느날 문득 잡은 기타를 더듬더듬 익히며 작곡을 시작한 악동뮤지션 이찬혁의 사례는 희귀한 게 아니라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목표를 정해놓고 미래로 달려가는 아니라, 그때그때 당면한 흥미를 채우면서 서서히 자신의 길을 확정지어가는 방식으로, 점점 더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거다.


사람은 저마다 발전 속도가 다르다. 그러니 누군가를 보면서 자신이 뒤처져 있다는 느낌을 받지 말기를. 당신은 자신이 정확히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조차도 모를 수 있다. 그러니 뒤처져 있다는 느낌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대신에 허미니아 아이바라가 진취적으로 직무 적합도를 추구하는 이들을 위해 제시했듯이, 실험을 계획하기 시작하라.
(...)  하면서 기꺼이 배우고 수정하고, 필요하다는 마음이 들면 이전의 계획을 포기하고 완전히 방향을 바꾸기도 하라.  (...) 한 직장이나 아예 분야 자체를 바꾼다고 할 때에도, 그 경험은 낭비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전문화 그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점도 명심하자. 우리 모두는 어느 시점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전문성을 갖추게 된다. 내가 처음 이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조기 전문화를 일종의 인생 해킹이라고, 즉 다양한 경험과 실험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막아 줄 처방이라고 제시하는,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퍼지는 글들을 읽고 관련 학회의 기조 강연들을 지켜보면서였다. 나는 이 책에서 그런 논의에 생각거리를 제공했기를 바란다.


엡스타인은 위와 같은 글로 현명하게 이야기를 닫는다. 분명, 모든 실패를 두고 실험의 결과값을 얻었다며 긍정만 하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하지만 좌절의 늪에서 더는 허우적대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다음 문장들을 주기적으로 읽으며 마음을 다잡아보려고 한다. 


'뒤처져 있다는 느낌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경험은 낭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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