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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리 Oct 04. 2022

영원한 피터팬, 페퍼톤스로부터

Writer's block Diary: 6일째


가을이 무르익을 무렵, 러브 썸 페스티벌에 갈 기회를 얻었다.


장소는 연세대학교 노천극장. 낮은 능선으로 에워싸여 꼭 외딴 섬처럼도 느껴지는 공간. 언젠가 와봤던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모르는 밴드들이 모르는 노래를 불렀다. 어떤 노래는 흥겨웠고 어떤 노래는 지겨웠다. 지겨운 노래에도 미덕은 있었다. 창작자의 자의식이 강할수록 거부감이 느껴지는 이유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으니까. 어딜 가든, 무얼 보든, 내 생각의 테두리는 창작의 자장을 에워싸고 있었다. 어쩔 수가 없이.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아는 밴드가 등장했다.


페퍼톤스. 후추와도 같이 매콤한 사운드, 라기보다는 청춘 특유의 탄산수 같은 사운드를 자랑하는 페퍼톤스. 그들이 결성한 지도 어언 20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각자의 가정을 꾸리며,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푸릇한 감정을 노래하는 그들은 그러나 현존하는 피터팬처럼, 익숙한 멜로디를 통해 과거의 어느 시점을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왜일까? 음악은 기억을 저장하는 습성이 있고, 거기에 담긴 인물들은 결코 변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https://youtu.be/ysGyyi6sDHI

Thank you (2014년)


함께 할 수 있기를, 햇살이 비추기를, 소리 내어 하하 웃고 모두 내려놓기를
한 치 앞도 캄캄한 이 먼 길의 어딘가에 소중하게 간직해둔 널 만날 수 있기를
노래할 수 있기를, 끝을 알 수 없기를, 다시 한번 쓰러져도 손을 뻗어주기를


황혼이 물드는가 싶더니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무대. 온통 기원과 소망으로 가득한 가사는, 공기를 진동시키며 이윽고 마음을 뒤흔들었다. 어린 시절의 가장 단순한 바람이란, 바로 좋아하는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아니었던가. 그런데 어른이 되면서 뿔뿔이 흩어진 우리들은 서서히 다른 시간대에 접어들어 다른 궤도를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모든 노래는 이야기를 담는다. 아무리 짧은 노래라도 시작과 끝 사이에는 언제나 이야기가 존재한다. 페퍼톤스는 언제나 부정보다는 긍정에 무게를 두며, 어린 날의 순수로 우리를 돌아가게 만들었다. 마치 70, 80살 노인이 되어도 그 자리에서 그렇게 노래할 것처럼. 그 뿐만이 아니었다.


https://youtu.be/-Rl3bHuOV7o

행운을 빌어요 (2012년)
행운을 빌어줘요, 웃음을 보여줘요, 눈물은 흘리지 않을게, 굿바이
뒤돌아 서지마요, 쉼없이 달려가요, 노래가 멈추지 않도록
수많은 이야기, 끝없는 모험만이 그대와 함께이길


어떤 노래는 부적이 된다. 마치 관객들 하나하나의 행운을 빌어주는 것처럼 그들은 속삭여왔다. 행운을 빈다고. 당신의 여정이 이야기가 되고 모험이 되길 바란다고. 어째서? 이 험한 세상에, 어쩌자고 그들은 낯모르는 우리의 미래를 축원할까? 이렇게 착해빠진 노래로, 도대체 무슨 무기가 된다고 이러는 걸까?


10년 전 업로드된 위 영상에는 이런 덧글들이 켜켜이 달려 있다.


-초5? 6? 때 이노래 처음 듣고 수능날 아침에 출발할때 이노래 꼭 듣겟다고 다짐하면서 아껴들었었는데,,,,벌써 수능 전날이네ㅎ,,,수험생 여러분들 여태껏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노력과 흘렸던 땀은 결코 헛된게 아니니까 혹시라도 결과가 기대에 못미친다고 해도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ㅜ 분명히 여러분들에게 값진 경험이 되었을거에요 지난 12년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침착하게 보고오세요 화이팅!

 

-안녕하세요 지금 고2인 학생인데요  제가 중2 8월에 갑자기 쓰러져 뇌염진단 받고 아산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람입니다..  중2때 언니가 병원에서 한번들려줬는데 희망을 주는노래라서/노래가 너무 좋아서 저장해놓고 맨날들었는데 다행히 퇴원도 하였고 다행히 일상생활에 영향없을정도로 엄청 건강해졌습니다  뭐 이 노래를 듣고 행운을 얻었다고 할수있겠군요  새로운 희망을 저에게 준 제 2의 삶  소중히 쓰겠습니다  이 노래를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노래 들으면서 유학생활 시작하고 1년 반 생활 중인데요... 지금 까지 행운이 안 따라 왔어요..ㅠ..ㅠ 이뤄지지 않을 것 같고 불안할 때 꼭 이 노래 들으러 와요 !!! 꼭 노력한 만큼 눈물 흘린 만큼 잘 풀리는 유학 생활 되길 !!!! 모든 삶의 행운을 빌어요!


-이 노래를 듣는 모든 이들에게 행운이 함께하길..


어쩔 수 없이 콧날이 시큰해지는 걸 느끼면서 나는 한 가지를 실감했다. 바로 이런 글을 쓰고 싶다고, 바로 이런 글을 써야한다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노래,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노래를 만드는 음악가는 결국 편하게 찾아갈 수 있는 식당, 언제라도 맛있는 밥을 제공해주는 식당 주인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고 근원을 뒤흔드는 이야기 역시 그러한 작용을 한다는 걸. 기꺼이 사람들은 그런 감정의 뒤흔들림을 기대하고 기다린다는 걸.


살아있는 한 벽이란 실존하니까. 욕망은 타인의 욕망에 부딪혀 쉽사리 좌절되니까. 그러니 우리는 기어오르기 위해서, 혹은 부수기 위해서, 혹은, 숟가락으로 몇 밀리미터라도 흠집을 내기 위해서, 버티기 위해서, 굳이 노래가 필요하고 필연적으로 밥이 필요하고 간절히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았던가.

 

https://youtu.be/sONm0FFLI3k

태풍의 눈 (2022년)
쿠구궁, 번개가 칠 때 눈을 부릅떠라
자, 크게 노래를 불러라, 힘껏 춤을 춰라 (힘껏 춤을 춰라)
몸을 웅크리고 숙여도 고개를 들어라
이제 여길 떠날 시간이야

이런 저런 노래와 이야기, 그림과 드라마, 영화와 한 줄 명언에 빚을 져가며 우리는 살아남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살아남는 방법을 고민하며 어떻게든 응원의 한 마디를 끝내 놓지 않는 작품들이야말로, 사람들에게 의미를 남기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조적인 푸념 이상의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대체 어떤 문장으로부터 출발해야 할까. 오늘도 답 없는 고민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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