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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리 Oct 22. 2022

검열관, 창작의 숙적

Writer's block Diary: 20일째

영화 <버드맨 Birdman>의 한 장면


한 사람의 안에는 한 사람만 살고 있지 않다.


<가시나무 새>의 노래가사가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로 시작하는 것도, 이석원이 에세이 <2인조>에서 "우리는 누구나 날 때부터 2인조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과 잘 지내는 일이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라고 고백한 것도 모두 같은 맥락일 것이다.


말을 하고 행동을 취하고 감정을 느끼고 생각을 하는 나와, 그런 나를 남인 양 바라보는 또 하나의 나, 자아 속의 그들에 대해서는 누구나 잘 알고 있으리라. 그런데 창작자에게는 여기에 몇 명의 자아가 더 추가된다. 바로 글을 쓰고 구상하는 지은이로서의 나와, 그 쓴 글을 고치는 편집자로서의 나, 그리고 최종 완성본을 남의 글인 양 바라보는 독자이자 검열관이자 B사감으로서의 나 말이다.


편집자로서의 나는 까다롭기는 해도 별로 무섭지는 않은 존재다. 해봤자 흥분해서 내 글이 최고라고 날뛰는 어린아이를 매섭게 노려보며, 빨간펜으로 초고를 딸기밭으로 만들거나 노심초사 공들여 쓴 문단을 비계덩이마냥 뭉텅뭉텅 덜어내거나 마침표 하나 찍었다 뺐다가 쉼표로 바꿨다가 자려고 누운 뒤 도로 컴퓨터를 켜고 다시 마침표를 찍게 만드는 게 다이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창작자들에게 누구보다도 무시무시한 존재는 바로 세 번째 존재, 검열관으로서의 나일 터다.


그는 처음에는 색깔도 냄새도 없이 나타난다. 어느틈에 무의식의 지하실로 스며든 녀석은, 지은이인 나와 편집자인 내가 어느 정도의 타협을 해서 글을 공개한 이후에야 유령처럼 활동을 시작한다.


만일 여러분이 창작자라는 족속들을 이해하고 싶다면(그런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지만) 영화 <버드맨>을 보길 권하고 싶은데(OTT 왓챠에 있다), 거기 버드맨은 바로 검열관으로서의 나를 상징한다. 그는 대낮의 길가를 활보할 때도 작가의 귓가에 간교한 말을 속삭이며 하늘에서 혜성을 떨어뜨려 빌딩을 불태우고, 사람들로 하여금 비명을 지르게 하며, 작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온갖 미친 짓을 하게 만든다.


이 검열관과 공생하는 법을 배우는 건 창작자로서는 일생 일대의 숙제와도 같다. 녀석은 죽어 마땅한 개자식인 것 같아도 알고 보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며, 사실 없앨래야 없앨 수도 없는 존재다. 


내부의 검열관이 왜 나타났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문명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인간들이 죄악시하는 개념들이 내재화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알몸으로 거리를 배회하는 게 공연 음란죄에 해당하는 것처럼 무엇이든 창작할 자유는, 그러나 아무거나 창작해서는 곤란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사실, 예술의 세계에서 '검열'은 대단히 역사적인 단어이다.


1960~90년대 대중음악에 국한해 말하자면 조금이라도 선정적이거나 기타 위원회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음악은 그 가사를 바꾸지 않으면 가수의 음반 발매나, 방송 출연이 전격 금지되었다. 영화 배우들 역시 소위 정부가 배포하는 블랙리스트에 오를 경우 은근히 캐스팅에서 배제가 되는 등의 불이익이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공식적 또는 비공식적인 검열을 행하는 주체는 주로 정부산하기관, 방송국, 신문사 등 언론매체나 제작사, 에이전시, 유통 플랫폼 등이다. 통신매체를 대상으로 해서는 방송방송통신심의위원회, 대중음악 검열로 유명했던 공연윤리위원회, 영상물에 대한 영상물등급위원회, 게임에 대한 게임물관리위원회가 있고 만화와 웹툰은 간행물윤리위원회가 관여하고 있는 것 같다(부정확한 정보라면 지적 부탁드린다).


그러나 누구에게 과연 예술을 판단할 권리가 있는가? 상상력이라는 자유에 대해 빨간줄을 긋는 게 가능한 일일까? 수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한데 판단의 기준은 어떻게 정하는가? 이러한 시대의 의문에 따라 이들 기관의 위상은 과거에 비해 훨씬 낮아졌다.


물론 최소한의 허들이 필요할 것 같긴 하다. 그 허들의 기준이 모호하긴 하지만 가령 홀로코스트에 대한 찬양, 미성년자에 대한 성적인 시선, 가해자에 대한 정당화 등등 공통적으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소재들에 대해서는 말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의견을 묻는다면, 역시 예술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걸 허용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배우 최민식이 언젠가 대담에서 이렇게 언급한 적이 있는데, 나도 이 의견에 동의한다.


"자정능력이 있다고 본다. 내가 싫으면 소비 안 하면 그만이다. 고급예술이 있으면 천박한 저질문화도 있는 건데 솎아내려는 게 무리인 것 같다. 스필버그가 <인디아나 존스>를 만들었지만, <쉰들러 리스트>나 <칼라 퍼플>도 만든 사람이다. 창작하는 사람은 속된 말로 ‘지 꼴리는 대로’ 만들어야 한다. 소비하는 사람들이 적당히 취사선택하면 된다."
 _ 씨네21, <진짜는 귀하다, 나를 귀하게 하라>, 2013년


어차피 상상력이라는 건 성욕, 수면욕, 식욕처럼 본능에 가까운 욕구이므로 억지로 막는다고 막아지는 문제도 아니니까. 창작자의 의견이나 생각은 아무리 쓰레기같은 것이었대도 시간이 흐르면서 더 나은 방향으로 진화할 여지가 있고, 검열이라는 낙인을 찍어 창작의 기쁨 자체를 포기하게 만든다면 배출구를 잃어버린 누군가는 더 이상 예술품 창작이 아닌 범죄행위를 저지르게 될지도 모르니까.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것들만 골라서 쏟아내는 건 AI에게 맡겨도 족할 테니까. 아니오라고 말하고 싶으나 단지 돌아올 불이익이 무서워서 껍데기만 내놓아야 한다면, 예술은 팬시용품 외에는 그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될 테니까. 족쇄들로 옭아맬수록 창작자는 비누처럼 닳아져서 마침내 거품이 되어 톡- 하고 터져 사라지고 말 테니까.


그러나 최근 논란이 된 아이돌그룹 뉴진스 <쿠키>에 성적인 코드가 있냐 없냐와 같은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나도 많은 생각이 들었다.


창작자의 의도가 정말 그랬는지, 맞다면 어디서부터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 아니라면 또 어떻게 액션을 취하는 게 맞는 건지, 이런 창작물에 대해서 소비자들이 각자의 판단에 따라 소비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씨가 마르게 하는 게 맞을지, 아니면 어리거나 판단이 미숙한 사람들을 위해 생산자, 유통 플랫폼, 창작자가 나서서 적극적인 피드백을 하고 관련 단체나 정부기관이 전문화라는 이름으로 법적인 판단이나 조치를 취하도록 놔두는 게 맞을지...


정답을 누가 알랴? 작품의 어떤 내용을 어디까지 용인하고 어디부터 거부해야 할지는 나라마다, 역사마다, 사람들마다 지금도 끊임없는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어쨌거나 이러한 고민을 거듭하며 오늘도 누군가는 작품을 생산하고, 또 누군가는 작품을 소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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