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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리 Oct 18. 2022

또 문학 책을 산다

Writer's block Diary: 17일째

Photo by Jessica Ruscello on Unsplash


어떤 의미로는, 꿈을 이루었다. 


책을 읽거나 책에 관한 글을 읽거나 책에 관한 생각을 하는 것으로, 하루가 점철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렇게 종일토록 책에둘러싸여 살면서도 퇴근길 지하철에서 전자책을 읽고, 씻고 누우려다가도 도서관에서 빌린 종이책을 읽고, 귀한 대목이 잊힐세라 허겁지겁 컴퓨터를 켜서 독서 메모를 한다.


현재 시점 기준 온라인 서점의 카트에 담긴 책은 163권. 위시리스트에 담은 책은 861권, 도서관 관심도서 목록에 있는 책은 317권이다. 그간 오갔던 크고 작은 오프라인 서점과 책방들에서 마주친 책도 있겠고, 사라진 곳을 포함해 지금까지 온라인 서점 세 군데를 나눠서 애용했고 이사를 적어도 열 군데 이상은 다녔으니 예전 도서관의 관심도서 목록에 대출 이력까지 합하면 지금까지 내가 읽었거나 읽고 싶어하는 책은 몇 권이 될지 가늠이 안 된다.


주변이 온통 이런 사람들 천지긴 하지만, 나도 책 욕심만큼은 어마어마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에 진저리가 쳐지기도 한다. 병이다, 병. 사고 나서도 안 읽은 책들이 한가득인데. 죽을 때까지 읽기만 해도 다 못 읽을 게 뻔한데. 죽고나면 관짝에 들고 들어가지도 못할 텐데. 


그래도 한동안 뜸하게 읽은 시절도 있었는데 하는 일이 일이라 그런지 올해만큼 독서 활동이 활발했던 해도 없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관심을 가진 도서 모두가 문학은 아니지만, 여전히 문학이 차지하는 지분은 확고하다.


지난 주말 동네책방 '책인감'에서 이윤설 시인의 <누가 지금 내 생각을 하는가>와 이소연 시인의 <거의 모든 기쁨>을 구입했고, 오늘은 장바구니에 담겨 있는 책들을 모조리 무시하고 대뜸 이기호 작가의 <눈 감지 마라>와 박선우 작가의 <햇빛 기다리기>, 그리고 이서기 작가의 <월 200만원도 못 벌면서 집부터 산 31살 이서기 이야기 1,2>를 샀다.


말이 난 김에 각각의 책을 산 이유를 고백해보겠다.


우선,  이윤설 시인의 <누가 지금 내 생각을 하는가>부터. 이윤설 시인의 시는 진작부터 좋아했다. 지병으로 일찍 돌아가신 뒤 유고 시집이 나왔다는 사실을 분명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이제야 제대로 읽을 기회를 얻었다. 


내가 그녀의 시를 사랑하는 건, 슬픈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 사람 문체가 어딘지 모르게 경쾌하고 명랑하기 때문인데 슬프게만 쓰는 건 쉬워도 유쾌하게 슬픔 위를 미끄러지는 건 꽤 쉽지 않은 일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슬픈 생각을 따라 가다보면 나는 기차가 되어 있다
몸이 길어지고 창문의 큰 눈이 밖으로 멀뚱히 뜨여있다. 나는 길고, 달리다 보면 창밖으로 식구들이 보인다. 어쩌자고 식구들은 추운 민들레처럼 모여 플랫폼에서 국을 끓이고 있는지 내가 지나가는데도 나를 발견하지 못하여 기다리고만 있다
나는 슬픈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네가 서 있는 곳을 지난다 푸르지 않은 짐가방처럼 너는 늘 혼자다 내가 가려던 소실점 같기도 하고 신호등 같기도 한데 나는 너를 지나친다 그러면서도 너는 아주 많이 늙어서 내 할아버지만큼 오래 살아서 그런데도 네가 나의 사랑인 것을 쉽게 알아본다 
슬픈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친구들이 건너지 않는 건널목을 지나고 하늘이 파래서 조각조각 깨지는 어느 자오선의 가장 뜨겁고 아름다운 부근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지나온 곳들이 나의 몸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빗방울들이 금세 차창 가득 별처럼 와 뒤덮히고 나의 차오르는 눈물이 내 몸의 일생을 지나는 것을 지나친다 슬픈 생각을 따라 가다 보면 
당신들의 육체를 길게 관통하며 강을 건너가고 바다의 슬픔을 건너
내가 되어가는 것을 알게 된다

-이윤설, 기차 생각


만약 위의 시로 부족하다면 나머지 수록작 중 <나무를 맛있게 먹는 풀코스법>, <작게 작게, 하마>, <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니> 3편을 다 읽어보기를. 분명히 당신도 나처럼 그녀의 팬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소연 시인의 <거의 모든 기쁨>은 인맥과 지연으로 알게 된 시집인데, 다 떠나서 문장이 좋아서 구매할 수밖에는 없었다. 


가령 '생일이 끝났을 땐 거의 모든 기쁨이 사라졌다 거의 모든 기쁨이 거짓이 되려 할 때 한 사람이 생크림을 뒤집어쓰고 달아나는 바람에 촛불이 꺼지고 다만 한 조각 진심이 남았다' 와 같은 구절이에서처럼. 분홍색 마블링이 뒤섞인 표지가 기쁨을 가져다 줄 것 같기도 하고.


이기호 소설가의 작품은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 다만 어째선지 내게는 황석영, 성석제, 김중혁 작가와 같은 집합으로 묶여 세태를 잘 드러낸 대중적 소설가라는 이미지였는데 이 엽편 묶음집을 미리보기 하면서 뭔가, 내가 예전에 한창 활동했던 '한페이지 단편소설' 시절이 떠올라 구매할 수밖에는 없었다. 


똑같은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모자이크하듯 엽편을 모으면 전체 그림이 어떻게 보일까, 하는 기대도 컸다. 물론 사은품 안경닦이도 가지고 싶었고... <눈 감지 마라>라는 책에 안경닦이는 지나치게 공교로운 사은품 아닌가!


박선우 작가의 <햇빛 기다리기>는 그의 두번째 소설집이다. 햇살이 가득한 표지도 반갑고, 거기 실려있을 자기만의 분투도 반가울 것 같아 벼르고 있었다. 그의 글은 소위 퀴어소설 내에서도 특별한 지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그는 사랑에 있어 무척 가녀린 문장을 쓰면서도 동시에 낙천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서기 작가의 <월 200만원도 못 벌면서 집부터 산 31살 이서기 이야기 1,2>는 세태 소설이다. 


종이책으로 살 수도 있었지만 이전 글에 언급했다시피 작가에게 한 푼이라도 더 보탬이 되는 건 전자책이기 때문에, 그리고 전자책으로 사면 중고로 되팔수도 없기 때문에 더더욱 작가에게 미약한 응원이나마 될까 해서 전자책으로 샀다.


이 소설은 송희구 작가의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1, 2, 3>와 더불어서 한국 소설계에 꽤 유니크한 지형을 만들고 있는데, 네이버 카페 '부동산스터디'에서 연재되던 글을 출판사에서 발견하고 책으로 출간한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이 분야의 원조격인 송희구 작가의 경우를 좀 더 살피면, 김 부장 이야기는 카페도 아니고 그냥 네이버 블로그에 게시되던 포스트였다. 이 포스트는 수많은 직딩들의 하트를 받으며 급기야 드라마화까지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 분이 다음에도 소설을 쓸까에 대해서는 의문이 좀 드는 것이, 지금 본인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 부동산을 중심으로 한 재테크 영상이 꾸준히 올라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부류의 소설은 정통 문학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일반인의 관점으로 바라본 돈과 생활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는데, 내게는 어쩐지 1930년대 쏟아져 나왔던 <레디메이드 인생> 류의 사실주의 소설들과 궤를 같이 하는 걸로 보인다.


이야기, 사람들의 진심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수단 중에서 가장 믿음직한 수단이 바로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실용 서적이 아닌 문학이, 이야기가, 시와 소설이 끝끝내 우리 삶 속에 우리와 함께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일 거다. 장르가 뭐가 됐건, 어떠한 방식으로 세상을 보여주건,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할 말'을 담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아닐까. 


쓰는 이여, 그러니 우리는 계속 쓰자.


어쩌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튀어나올 무수한 이야기들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우리의 보잘 것 없는 일화가 누군가에게는 단서가 되고 열쇠가 되고 맞은편 옥상에서 반짝거리는 거울의 반사광이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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