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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리 Oct 17. 2022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가짜이면서 동시에 진짜인

Writer's block Diary: 16일째

Photo by DeepMind on Unsplash


문학 잡지에 글이 실리는 것이 등단을 의미한다면, 나는 초등학교 N학년 때 등단했다.


어릴 때만 해도 상태가 괜찮았으므로 각종 경진 대회에 불려나가곤 했던 나는 특히 글쓰기에 미쳐있었는데, 당시 담임 선생님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격려를 퍼부어주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몇 살이었는지는 몰라도 글쓰기 대회에서 A4 한 두장 남짓한 이야기를 지었고 상을 받았으며 지역신문에 실렸다. 그러고 나서 그 이야기는 어린이문예인가 하는 잡지에 재수록되었다(고 막내 고모에게서 전해 들었지만 정작 그 잡지를 구경하지는 못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여자아이가 카나리아를 기르고 있었다. 아이는 새장 속의 카나리아를 보면서 너처럼 갇혀서라도 소리 내어 울고 싶다고 독백했다. 이야기 속 아이에게는 자신을 격려해주는 동네 오빠 및 보호자인 할머니가 있었으며, 부모와 목소리는 없었다. 이야기 밖, 실제의 나에게는 부모와 오빠는 없었고, 목소리와 할머니는 있었다.


멋모르고 내가 지은 이야기는 실제와 뒤섞여 실제도 실제가 아닌 것도 아닌, 굉장히 미묘한 지대에 놓여 있었지만 그런 복잡한 사정까지 파악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이후 중학교에 진학한 내게 어떤 친구가 다가와서는, 잡지에서 내가 지었던 글을 보았다며(이 기억이 맞는지 검증은 어렵지만 아무튼) 알은체했다. 그 친구는 자신도 컴퓨터에 '한글 97'이라는 프로그램으로 무엇인가를 끄적거린다고 했고, 그 글을 보여주기도 했다. 무슨 이십 대 청년이 쓸 것 같은 내용으로 상당히 잘 쓴 글이었는데, 알고 보니 녀석은 서태지의 광팬이었다.


왠지는 몰라도 그 이후, '웰컴 투 스토리 클럽(관사가 빠진)'이라는 이름의 한 페이지짜리 신문을 만들었다. 제목 옆에는 파마머리 여자아이가 원 안에서 펜을 들고 있는 로고도 직접 그려넣었다. 신문에는 나와 그 친구가 짧게 지은 이야기가 실렸고 사소한 주변 소식도 빠지지 않았다. 그렇게 완성한 신문을, 학교 프린터였는지 글 쓰는 친구네 집에 있는 프린터였는지로 몇 장 프린트 한 뒤 친구들에게 (강제로) 무료 배포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이클립스'라는 제목으로 판타지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클립스는 프롤로그만 쓰다가 곧 포기해버렸으나, 이 때 얻은 추진력으로(?) 친구들을 등장인물로 삼아 무협소설 한 편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는 H.O.T의 팬픽으로 유명해진 이지련 작가의 <협객기>에 무척이나 뽐뿌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협객기는 다섯 권 짜리였고 프린트한 내 원고는 한 권 분량이었지만 그래도 탈고했다는 보람을 조금 느끼기는 했었다.


이게 끝은 아니었다. 나는 다시 나와 친구의 이름을 바꾸고 상황을 변형시켜 청소년 소설을 하나 더 썼다. 그리고 당시 유행했던 자비 출판이라는 것을 해서 세상에서 단 한 권 뿐인 책을 만들었다. 그 소설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가 최근 등장인물이었던 친구의 제보를 통해, 현재까지도 멀쩡히 살아남아있음을 알게 되었다.

 

필명 이은후... 누구에게나 흑역사는 있다. 


이렇게 이야기에 대한 과거사를 풀어놓은 것은 한 작품을 두고 실제냐, 아니냐,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부터 창작이냐에 대한 일반적인 물음에 대하여 나름대로 답변을 정리해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소설은 그것을 쓴 사람이 현실을 소화한 결과물이다. 지난날의 내가 카나리아 이야기, 무협소설, fREe eNd를 쓴 것은 내가 이야기를 통해 주어진 몫의 현실을 소화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짜이면서 진짜이다. 진실과 거짓은 한몸처럼 뒤엉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창작한 이야기를 두고 진실과 거짓의 함량을 논하는 건 남의 대변을 헤집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하고 추잡한 일이 된다.


덧붙여, 창작한 이야기가 노골적으로 현실을 불러들이거나 구체적으로 실제를 연상하게 해서곤란하다고 생각한다. 그럴 거면 아예 에세이나 논픽션으로 써야 옳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참맛은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상인지 현실인지 헷갈리는 데서 비롯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점을 놓치면 실화도 동화도 아닌, 어중간한 괴물이 탄생하고 만다.


이야기는 현실이라는 테두리를 지우고, 계산된 위험으로 가득한 가상의 장소로 독자를 데려감으로써 정신에 해방감을 선사하거나, 선사하려고 애쓴 산물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야기가 현실의 우리를 더 강인한 인간으로, 더 따뜻한 인간으로 만들어주리라 믿게 된다. 잘 쓴 이야기라면 자연스럽게. 못 쓴 이야기라도 약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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