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깨달음과의 경계는 한 걸음 차이
한라산이 주는 삶과 깨달음의 경계
한 걸음 차이
한반도의 기록적인 여름 무더위에서 무탈하게 살아남은 육지의 나그네를 위해 10월의 제주는 어느 향연을 준비했을까? 갸우뚱하면서 생각해 본다. 희망의 푸른 바다, 땀의 결실 노란 감귤, 아니면 1139번 지방도로의 단아한 단풍, 아닐 거야.
제주도 영실 코스는 수줍은 듯이 내 옷자락을 슬그머니 당겼다. 그뿐이었다. 이어지는 영문 모를 영실 매표소에서의 기다림, 오직 한라산 영실 휴게소 진입을 위한 차량 줄 서기였다. 그 대열에 합류·이탈은 온전히 본인 자유의 몫이었다.
자연을 닮은 국립공원 유니폼을 착용한 사나이 손에 쥐어진 문명의 이기가 코맹맹이 소리를 낸다. 동시에 바리케이드가 ‘쓱’ 올라가고 나는 ‘싹’ 지나갔다. 간간이 걸어 올라가는 등산객을 서너 번 뒤로 하자 영실 탐방로 입구가 보였다.
탐방로 입구 주위에서 뿜어 나오는 10월의 한라산 단풍 색은 나로 하여금 등산화 끈을 다시 조이게 한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한라산 10월의 단풍 쓰나미는 눈으로 감당하기 어렵다. “으아 좋다! “ 소리쳐 보지만 소용이 없다.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한라산의 10월은 제정신이 아닌 나를 오르게 한다. 한라산의 가을은 그렇게 다가왔다 다시 제자리로 가곤 했다. 1400m 고지에는 잔가지 끝 마지막 잎 새에 화려했던 단풍의 흔적을 선명히 남겨놓았다. 그리고 어머니 품으로 돌아온 낙엽은 힘겨워하는 한라산 방랑자인 나그네의 무거운 발길에 황금 양탄자가 되어 주었다.
구름 같은 단풍나무 숲 속에서 어느 순간, 한 걸음 옮기자, 마치 몸이 무너지는 고행자의 눈동자에 라싸의 성지 포탈라궁이 들어오듯 영실기암 세계가 너무나 당황스럽게 펼져진다. 색과 공의 경계, 삶과 깨달음의 경계, 성숙과 미성숙 간격이 우리네 척도로 보면 ‘아마도’ 한 발자국 정도의 거리밖에 되지 않나 보다.
한라산 영실코스는 비교적 무난한 등산로이지만 유독 이 구간에는 매우 힘든 코스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실기암과 영실계곡 단풍으로 본의 아니게 취중 산행이 도움이 되었다. 몽롱한 정신에서 보아서 그럴까 오백나한 위 하늘은 하늘이 아니라 제주 바다가 올라온 듯하다. 정신을 잃어 주저앉자 잠시 쉬어 간다. 제조일이 3만 년이나 되는 영실기암을 오늘 바라보니 감개무량하다. 갑자기 뒤에서 ‘까악’하는 까마귀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멀리 북 제주 앞바다가 펼쳐진다. 섬과 바다의 구분은 명확한데 하늘과 바다의 경계는 없었다. 그래서 영실기암 위로 제주 바다가 올라왔나 보다. 영실기암 구간에서는 올라가는지 영실계곡으로 빠져 들었는지 모를 정도로 풍광이 너무나 자연 자연스러웠다.
풍경의 마의 구간을 뒤로하고 조금 힘들어질 때쯤 잔잔한 구릉이 나타났다. 단아한 한복 같다. 청순한 곡선은 신비로웠다. 마음을 보듬는 연초록 조리 나무와 연갈색 초원이 잔잔하게 내적 에너지를 강화시켜 준다. 노루샘에서 한 마리 목마른 노루가 되어 목을 축이고 한라산 남벽 아래 윗세오름으로 발길을 옮긴다. 한가롭고 평화로운 길을 걷고 있다. 지금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