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달라
꼭 400년 전, 지금과 유사한 조선시대가 있었다.
부차 전투?
후금(이후 청)은 만주의 대부분을 통일한 후, 다음 대상은 명나라였다. 당연히 명나라도 후금을 칠 계책을 세우고 조선에 원병을 청해 왔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지금도 비슷하지만 출병에 대해 찬반양론이 팽팽하였다.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온 명나라의 원병을 명분상 거절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였다.
지금으로부터 꼭 400년 전 1619년, 조명 연합군은 부차 전투에서 후금에 패배하였다. 강홍립과 조선군은 정세를 파악하여 ‘상황에 맞춰 행동하라’ 지시한 광해군의 밀지를 받고 명-후금과의 싸움에 출전하였으나 후금에 투항함으로써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성사시켰다. 명에게는 파병이라 명분을, 후금에게는 예정된 투항을 함으로써 신뢰를 쌓았다. 역사이기 때문에 지난 후 결과를 가지고 평가한 것이 아니다. 즉 사후확신 편향입장(결과를 보고 “내 그럴 줄 알았다” 식)이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는 단서들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꼭 400년 전, 1619년의 조선은 칠흑 같은 바다 한가운데 돛단배였다. 이 돛단배의 나침판(북극성)은 분명히 있었다. 선왕인 선조가 신충일에게 후금의 인문 지리 정세 등을 상세히 조사하게 하였다. 후금의 능력을 파악한 유명한 「건주기정도기」가 바로 그것이다. 조선시대 최초로 만들어진 만주 정세 보고서였다. 다음이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면서 조선을 도왔던 명나라는 왜란 후 국력이 한층 쇠약해졌음을 누구나 파악하고 있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아무리 강대국이라 할지라도 원병이나 전쟁은 심지어 작은 국지전이라 할지라도 나라의 흥망성쇠에서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지금은 어떠한가? 400년 전보다 더 어려운 상황일까?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현재와 과거만 있을 뿐이고 그 당시 시대에도 지금과 똑 같이 미래는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미국과 중국, 어디가 명이고 후금인지 분간하기조차 어렵다. 분명한 것은 강대국이 2 이상 있는 동안에는 언제나 전쟁상태였다. 그 증거가 바로 역사이다.
충돌하는 두 강대국 사이의 가장 쉬운 외교는 어쩌거나 어느 한편에 서는 것이다.
두 번째는 어느 편에도 들지 않는 것이다. 가장 어려운 외교는 양쪽 모두 속하는 것이다. 일명 ‘줄타기’ 외교인데 가장 어려운 외교이지만 방법은 있다. 강대국과의 밀당이 아니라 결정을 지루할 정도로 심지어 신경질적인 반응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 또 시간을 달라 ‘ 시간과의 싸움을 하는 것이다. 늦추는 것만이 그나마 미래의 시간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욕심을 부린다면 광해군의 중립외교의 지혜가 담긴 현재 판 「건주기정도기」정도를 찾아내는 일일 것이다.
아울러 일본의 문제는 문제도 아니다. 일본은 지는 석양이기에 그들에게 시간은 매우 불리한 쥐약이다. 흘러가는 대로 같이 흘러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