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 사회 - 흐름의 절단과 접합
최고의 단계에서는
백성들이 통치자가 있다는 것만 안다.
그 다음은 친밀함을 느끼고 그를 찬미한다.
그 다음은 그를 두려워한다.
그 다음은 그를 비웃는다.
통치자가 백성들을 믿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도 통치자를 믿지 못한다.
조심스럽구나! 그 말을 아낌이여.
공이 이루어지고 일이 마무리되어도,
백성들은 모두
“우리는 원래부터 이랬어!”라고 하는구나.
노자 <도덕경> 17장
위너의 사이버네틱스는 자연의 무질서한 흐름을 국지적으로 역전시켜 질서를 만들어내는 생명 유기체의 작동 원리와 흡사하다. 이는 자연의 내재한 작동 방식을 모방한 것으로, 이러한 통제는 외부의 힘을 동원해 억지로 자연 엔너지를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자연스러운 흐름들을 조심스럽게 절단시켜 다른 흐름과 이접시킴으로 새로운 흐름을 창조해 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물질계에선 쉽게 적용이 되지 않는 면이 있다. 만이 모든 흐름들이 서로 자유자재로 접합되고 절단된다면 생명체는 자기 동일성을 유지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위너의 사이버네틱스는 고립계의 자동화 기계를 창조하지 않았다. 이 기계는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감각 기관을 가지고 있었고, 피드백을 통해 자발적인 진화를 거듭하는 총제적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기계의 운동 목적에 부합하는 정보의 흐름을 절단시켜 수합하여 자기 내부 원리로 동작하게끔 만든다.
한편, 위너의 사이버네틱스 개념을 앞서 살펴본 인간의 예속으로 부터의 벗어나려는 특성과 연결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오늘날 현대의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예속은 자연의 무질서한 경향으로 파악된다. 자연의 무질서한 경향에 대해 위너는 이를 마니교적인 악이거나 혹은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악으로 바라보고 있다. 마니교적인 악은 의도적으로 선을 행하지 못하게 하는, 악의 짓궃은 방해라면,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악이란 보다 수동적인 악을 마란다. 즉 자연의 무질서함에서 질서적 경향을 찾으려는 과학자들에게는 질서를 찾는 것을 방해하는 자연의 행위가 마치 예속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필자는 조심스럽지만, 이들이 이러한 자연계의 경향을 안정된 틀 안에서 다루기 위해 정보라는 형이상학적인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해다고 주장하려 한다. 정보는 탈 물질화되 기호 체계로 작동한다. 물론 위너는 이러한 정보 역시 빛 알갱이 혹은 공기 알갱이와 같은 물질을 기반한다고 하지만, 실상 중요한 것은 기호로서의 정보이다. 이러한 공허한 정보는 물질과 달리 이질적인 대상들을 갖지 않으며, 따라서 여기 떼었다 붙였다 할 수있고, 이를 셈할 수도 있게 된다. 따라서 이것의 결과는 기존에 상호 양립불가하였던 계층간의 소통을 가능케 한다. 이는 물질의 정보화로 물질을 미시단위로 쪼개어 들어감으로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로 소급해 들어가는 에피쿠로스적인 발상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특징은 앞서 우리가 살펴본 포획 장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광합성의 예와 같이, 생명 유기체는 자연의 엔트로피 경향에 역행하는 질서를 만들고 이를 자신의 동력으로 사용한다. 즉 생명체는 자연에 산재하고 있는 무질서한 흐름을 자신의 생존이라는 목적을 위해 질서된 방식으로 가두고 이를 활용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꽤나 당황스러운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기술이 자연스러운 포텐셜 에너지를 인위적인 질서의 안으로 포획하는 것에 대해 지적하려 했으나, 이러한 원리가 생명 유기체의 원리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생명 유기체와 유사한 기계를 만들려는 위너의 기획은 자연의 포텐셜 에너지를 질서 지우는 생명 유기체의 본성을 참조해서 만든 것이었다. 즉, 앞서 언급한 젊음의 탄력을 흡혈하는 포획 장치의 정체가 사실은 생명의 본질이었던 셈이다.
들뢰즈가 말했듯, 세계는 흐름을 절단하고 접합시킨다. 하지만 여기에는 인간의 의도와 같은 뚜렷한 목적을 발견하기 힘들다. 그렇기에 자연의 의도는 선과 악으로 구분할 수 없다. 하지만 앞서 전통적 인간의 개념에서 살펴본 바,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방식으로 이성을 사용하는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는 필연적으로 그 모적에 귀속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흐름의 인위적 통제를 지난 수천년의 역사를 통해 경험해 온바 있다.
이는 군주제 혹은 전체주의, 파시즘,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등 과 같은 시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이들 이데올로기의 작동 방식 역시 위의 사이버네틱스의 통제 기계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브뤼겔의 이카루스 작품에 등장하는 노동하는 인간 군상들의 포텐셜 에너지가 무엇을 종사하는 지를 추적해 들어간다면 이러한 지배적 사회체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 질 것이다. 이들 노동자들은 사회체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절단시킨 한 흐름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한 흐름들을 무수하게 접합시킨 것이 바로 사회체이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흐름의 통제는 지속된다. 신자유주의 시대라 불렸던 근래의 세계, 국가 고립주의로 돌아서고 있는 현재에도 이러한 통제의 손길은 계속해서 뻗쳐간다. 특히 포스트휴먼과 관련된 논의들은 인간의 비인간화를 필연적으로 거쳐갈 수 밖에 없다. 포스트휴먼은 인간도 아니고 기계도 아닌, 인간과 기계의 흐름을 절단시키고 접합시키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이는 흐름의 (이전까지의)자연스러운 결합의 형태를 인위적으로 이어붙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통제의 원리는 자연의 방식과 유사하다고는 하나, 자연과 완벽히 일칳나다고 볼 수 없다. 또한 그렇게 창조된 생명이 외부환경에 적응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 역시 안이한 발상일 수 있다. 실제로 GMO 유전자 조작을 이용해 병충해에 강한 슈퍼 옥수수가 만들어져 한동안 농업 종사자들의 수입을 극대화 시켰었다. 한편으로 이를 통해 지구의 기아 문제와 식량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으리라 내다 본 적도 있엇다. 하지만 이 옥수수가 등장하고 채 몇년이 지나지 않아, 해당 옥수수의 살충력에 적응할 수 있는 충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또한 유전자 조작 식품이 인간 신체와 지구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과학자들은 이를 과도기적인 현상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복잡한 가이아 시스템 안의 존재에 작은 변화가 일으키는 큰 변화에 대한 책임은 누가 어떻게 떠안을 것인가의 문제가 남아 있다.
노자는 최고의 통치를 통치자가 있다는 것만 알 뿐 통치자가 행하는 일은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이상적인 통치자는 자연의 행함과 같이 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통치자가 있다는 것 조차 인지 하지 못한 통치를 강요받고 있다. 무엇이 우리의 삶을 이끌고 있는지에 대한 자각조차 없이 폭풍에 휘말리듯 떠내려가고 있다. 우리는 유사 자연을 모방한 통제 방식을 차용한 기술에 의해 인간의 근본 조건에 까지 변화를 가져오려고 한다. 과연 우리는 오랜 소망, 포스트-휴먼이 될 수 있어 신에 가까워 질 수 있을까?
필자는 백남준이 이미 1960년대 부터 이러한 미래를 내다보고 문제 상황을 지적하고 해결할 방법을 제시한 텍스트를 발견하였다. 다음 5장은 이에 대한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