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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맹드 Mar 23. 2023

계량기가 터졌다

1층에서 겨울나기(3/3)

     한숨 자고 나니 어제의 세탁기 사태는 다행히 잊어졌다. 근데 웬걸. 아침에 정수기 버튼을 눌렀는데 물이 나오지 않았다. 등골이 서늘졌다. 

주방의 수전을 열었는데, 마찬가지였다. 화장실에도 물이 나오지 않았다.

'휴... 이번엔 수도관이구나...'

대답 없는 비싼 수전을 보며 엉엉 울고 싶어졌다. 아이처럼 온몸으로 떼를 쓰고 싶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자


정신을 차리고 편의점으로 가 생수 2리터를 샀다. 그 와중에 1+1 행사가 위로 아닌 위로가 되었다.

'다른 한 병은 절대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라고 중얼거렸다.


전기 주전자로 물을 끓여 미지근하게 만든 후, 수건을 적셨다. 젖은 수건을 수도관에 감싸고 좀 있으니 물이 나오기 시작다.

안 입는 겨울잠바를 수도계량기에 입혀주었다.
하지만 다음 달도 얼었다.
생수를 또 뜯고 말았다.


     기온은 영상을 회복해도, 이미 한번 얼었던 수도관은 쉽게 녹 않는다. 

연휴를 길게 보내고 집에 돌아온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수전을 열었다. 예상대로 물이 나오지 않았다.

'슬픔 예감은 정말 틀린 적이 없구나.'

같은 일을 두 번이나 겪다니. 원망과 짜증이 일었다.

에이씨

미지근한 물을 수도관에 그대로 갖다부었다. 그 덕에 수도관은 금세 녹았고, 물이 공급되었다.

샤워를 하고 나와선 무슨 촉이 발동했는지, 대문 밖으로 나가봤다.

복도에 물이 흥건했다. 수도계량기가 터진 것이었다.


     한 시간 동안 복도를 닦았던 그날은 아빠만 아는 내 흑역사가 되었다. 고무장갑을 끼고 내 안방 닦듯 아파트 복도를 닦았다. 말짱한 수건 6개를 버렸다.

실시간으로 어는 살얼음을 보며 이 계절이 참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나는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좋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계량기 교체를 도와준 기사님은 아파트 상근 직원분인데, 1시간 동안 나와 같이 복도를 닦아 주셨다.

진짜 고마웠던 건, 날 나무라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계량기에 물 직접 부으셨어요?'

'아니요, 젖은 수건으로 감쌌어요'

궁지에 몰린 쥐새끼처럼 나는 거짓말을 잘도 했다.

하지만 아마 거짓말인걸 짐작하셨을 거다. 염치없지만 그 묵묵부답이 감사했다.

 

청소 여사님께 구운 빵을 몇 번 가져다 드린 덕에, 나는 '1층 사는 착한 처자'로 인식돼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여사님께 가서 죄송하단 말씀과 함께  빵드밀었다. 


"얼어있는 곳이 있으니 조심하셔야 될 거예요."

"어이구 이런 걸 다..  고마워요."


      그날 오후, 오래 비워두었던 딸 집에 무슨 사고라도 예상하신 건지, 아빠의 문자가 와 있었다.

딸의 재해에 호들갑 떨지 않는 아빠가 고마웠다.
존중받는 느낌이 들었다.


'사랑한다'의 반대말은 '사랑했었다'라고 누가 그랬는데.

나 정말 겨울 사랑했다.

잘 가 겨울아. 난 이제 여름이 더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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