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아니야 와장창
불쾌함은 게으름과 똑같은 것이지요. 우리는 선천적으로 게으름에 젖기 쉬운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쁨은 활동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겁니다.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中
역시, 이래야 게으름 연재답지. 시작 첫날부터 마감기한을 놓쳤다. 엊그제는 뭐 새로 태어난 것처럼 세상에 다짐해놓고선 하루만에 '닉값' 해버렸다. 참으로 충실하게 게으르다. 이젠 창피하지도 않다. '니가 그렇지 뭐'는 그 누구보다 내가 나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이다. 새 사람이 되는 일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뻔하지만 '새가 알을 깨는 비유'가 떠오른다. 어떤 비난과 편견 같은 두꺼운 알 껍질을 열심히 발길질 하다 보면 어느새 금이 가고 알이 열리고 비로소 새롭게 태어난다는 내용이다. 나도 나의 알에 대해 생각했다. 깜깜하고 좁은 내 알. 절대 깨지지 않을 것처럼 두껍다. 이 부담스러운 알껍질은 대부분 스스로 만든 거다. 오랜 시간 겹겹이 쌓여온 나에 대한 실망과 불신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답답해서 이렇게라도 발버둥 치는 것이 언젠가 새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은 가졌구나 싶다.
모든 일을 항상 귀찮아서 미루는 것만은 아니다. 이번 같은 경우는 억울해진다. 정말로 새 사람이 되고자 하루종일 글에 대해 생각했다. 하루 마지막엔 반드시 글을 쓰자고 필사적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손가락이 꼼짝도 하지 않는다. 치명적이게도, 가끔은 더 잘 해내고 싶을 때 게을러지기도 한다. 기준을 너무 높게 잡은 바람에 부담스러워서 일을 자꾸 미루는 것이다. 이런 멍청한 완벽주의자라니. 여기에 '대충 할 거면 차라리 안 한다'는 곤조까지 더해지면 완벽한 '흐지부지'가 완성 된다. 슬프게도 일상의 대부분이 이렇다. 좀 기준이 낮던지, 덜 게으르던지 둘 중 하나만 하지...
다시 생각해보니 완벽주의는 나 같은 사람이 아닌 듯 하다. 높은 수준에 대한 집착은 성실이 동반되었을 때만 완벽주의가 된다. '이게 아니야!' 도자기를 왕창 깨부시려면 당연하게도 잔뜩 만들어야 한다. 내내 빈 물레만 쳐다보는 도예가가 어떻게 장인이 될 수 있겠는가. 완벽주의로 포장된 것이 실은 다 내 강박이었고, 너무도 쉽게 게으름의 합리화가 되어주었다. 명쾌하게도, 편견을 깨는 일도, 알을 깨고 다시 태어나는 일도, 장인이 되는 일도, 결국 꾸준함에 달려 있다. 그래 일단 쓰자. 쓰고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쓰자. 허접한 창조를 두려워 말자. 좋은 발길질을 위해선 헛발도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