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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Apr 03. 2020

나의 슬픈 에이전시

번역가 이야기

몇 년 전, 다른 번역가들의 활동을 염탐(?)하던 중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10년 넘게 활동하면서도 에이전시를 끼고 일하는 사람들이 은근히 많다는 것, 게다가 그걸 큰 장점으로 꼽는다는 것이다.


새로운 역서를 접하면 늘 번역가와 그이의 이력부터 살피는 나는 역서가 50여 권이 넘는 한 번역가가 00 에이전시 소속인 것을 알고 좌절감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분 역시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랬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영업 같은 부수적인 것은 에이전시에게 맡기고 본인이 잘하는 일에 집중한다는 전략.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뭐 나름 나쁘지 않은 전략 같기도 하다.


문제는 한 에이전시에 소속되어 꾸준한 일감 확보가 가능하냐는 건데, 최근 브런치에서 발견한 한 번역가를 보니 가능하긴 한가 보다. 10년 넘게 바른 번역에 소속되어 일하는 것을 보니(바른 번역 소속 번역가는 다른 번역 에이전시와 일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다). 이 분은 10년 전 계약을 시작할 때도 3,500원으로 시작했단다. 실력이 좋았으니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그래도 나 같이 A4 1장당 13,000원에서 시작한 사람 입장에서는 부럽기 짝이 없다. 




일부 에이전시에서 가져가는 수수료의 비율은 초짜의 경우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높다. 많지도 않은 번역료에서 20퍼센트를, 초짜의 경우 더 많은 금액을 떼어 버리고 나면 번역가에게 제공되는 금액은 그 노력에 비해 인간적으로 너무 적다. 게다가 한 에이전시에서 꾸준히 일을 준다는 보장이 없는 현실.


이 두 가지 때문에 난 출판사와의 직거래를 선호하는 편이다. 그리고 편집자와 거래를 통해 출판계 돌아가는 사정도 파악하고 단순히 번역만 하기보다는 책을 만드는 과정에 동참하는 한 사람으로서 펄펄 뛰는 현장감을 느껴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에이전시에서 주는 책을 수동으로 받기만 해서는 내가 번역해 보고 싶은 책을 번역할 수 있는 기회를 절대로 잡을 수 없기도 하다. 누구나 번역할 수 있는 류의 책이 아닌 자신만의 분야를 개척해 나가고 싶은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에이전시의 품을 벗어나야 할 거다. 나 역시 현실은 여러 에이전시와 출판사에 어정쩡하게 발을 걸치고 있지만 언젠가는 에이전시의 품을 벗어나 완전히 독립하고픈 바람이다.     



대학원 재학 시절, 그때만 해도 얼마나 아는 게 없었던지 나는 대표적인 구인구직 사이트를 뒤적여 한 에이전시를 찾아냈다. 허나 그 에이전시는 처음 몇 번을 제외하고는 돈을 제 때 주지 않는, 아직까지도 수많은 초보 번역가를 상대로 동일한 행각을 벌이는 곳이었다. 누군가의 순수한 열정을 이용하는 그곳에서 상처를 받은 후 난 믿을 만한 에이전시와 거래를 했고 그때 정신을 바짝 차린 건지 다행히 그 이후부터는 사기를 당한 적이 없다. 제대로 액땜한 셈이다.      


그렇게 에이전시를 통해 출판 번역계에 발을 디딘 난 첫째 아이가 돌이 지날 무렵부터 일이 잘 풀리면서 1인 출판사 여러 곳과 거래를 트게 되었다(물론 에이전시와 여러 권을 진행한 후였다). 그렇게 출판사와 직거래를 하다보니 수입은 계속해서 상승곡선을 그렸고 에이전시에서 주는 일은 할 시간도, 여유도 되지 않았다. 이렇게 서서히 에이전시와는 거리를 두게 되는 거구나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나를 이만큼 키워줘서 감사하지만 이제는 그 정도 돈을 받고 일을 할 수가 없으니 손을 놓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거였다.      


하지만 둘째를 임신하고 출산하고 그렇게 두 아이의 엄마가 되는 동안, 상승하던 수입 곡선은 다시 후퇴하기 시작했다. 분명 나는 똑같았는데 나와 거래하던 1인 출판사의 외서 기획이 중단되었다. 야심 차게 출판 시장에 뛰어든 사장님들은 1년에 책 1권 내는 것으로 만족했는지 더 이상 기획된 외서가 없다 했다. 혹시 내 번역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해서 출판사 검색을 해봐도 다른 책이 다른 역자의 이름으로 번역되어 나온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단군 이래 매해 불황을 경신하고 있는 출판계의 사정이 한몫했으리라.


그런 상황에서 연락 오는 에이전시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칠 수는 없었고 그렇게 나는 지금도 에이전시에 한 다리를 걸치고 있다. 일감을 꾸준히 주는 출판사와 거래를 트기 전까지는 불가피한 일이다.




누군가에게는 편안한 울타리로, 누군가에게는 마지 못해 거치는 단계로 역할하는 에이전시. 생각하기 나름일 거다. 각자 좋아하는 일, 잘 하는 일은 다를 테니. 최근에는 양심적으로 활동하는 에이전시들도 있어 눈 여겨 보고 있는 참이다.


답이 오지도 않는 출판사에 계속해서 연락을 돌리는 게 맞는 것일까, 맘 편하게 에이전시에서 주는 일을 받는 게 맞는 것일까? 오늘도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을 던지며 도돌이표 같은 생활에 마침표를 찍게 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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