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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Jun 12. 2020

내 일이 재밌어지기 시작한 건

우리는 능숙한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재능과 능숙함은 다르고, 후자는 무조건 꾸역꾸역의 나날이 필요하다. 버틴다고 뭐가 되지는 않지만, 그런 보장은 없지만, 재미없는 걸 참아내는 시간 없이는 재미가 오지 않는다.

                                                                                                                   《출근길의 주문》, 이다혜


번역이라는 세계로 넘어오고 나서 나는 온전히 나의 손으로만 결과물을 완성한다는 생각에 즐거웠다. 회사에서는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기획서를 하나 작성하는 데에도 수많은 사람의 의견이 들어가야 했고 문구 하나조차 내 마음대로 작성할 수 없었다. 그렇게 작성한 기획서가 윗선의 결제를 받는 데에는 한참이 걸렸으며 우여곡절 끝에 진행이 이루어진다 해도 말도 안 될 정도로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야 했다.


그래서 번역가가 된 이후 나는 자발적 야근을 한다 해도 회사에서 마지못해 일할 때와는 달리 희열을 느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나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한다는 그 짜릿함은 상대적인 경제적 궁핍 속에서도 계속해서 번역이라는 걸 하도록 만든다.




맨땅에 헤딩한 것치고는 초반 성적이 나쁘지 않았다. 두 번째로 인연을 맺은 에이전시는 나의 전공을 감안한 건지 계속해서 건축이나 인테리어 관련 책을 주었고 그림이 많은 그런 책들은 크게 돈벌이가 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내가 무사히(?) 다른 세계로 진입한 것에 들떠 크게 개의치 않아했다. 돈벌이보다는 자아실현의 욕구가 컸던 때였다.


하지만 일을 하는 데 있어 재미라는 것이 꾸준히 따라오려면 적당한 자아실현과 적당한 사회적 의미에 적당한 돈벌이가 조합되어야 한다. 시간이 갈수록 이 돈벌이가 과연 맞는 건지 의문이 들기 시작한 내가 나의 가치, 일의 가치에 물음표를 띄워보게 된 건 그 때문이었다.


시간은 많이 투여해야 하는데 그 일로는 합당한 소득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다른 이유가 있어야만 그 일을 해나갈 수 있다. 그 일에서 재미를 느끼든지, 그 일이 또 다른 일로 이어질 수 있는지, 그 일에서만 얻을 수 있는 여러 감각이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든지.  

                                                                                  《우리가 서로에게 미래가 될 테니까》, 윤이나


억울한 일은 하지 말자는 생각이 든 건 그때부터였다. 재미없는 걸 참아내는 시간이라고 버텼던 어떤 구간을 넘어섰는데도 꽉 막힌 정체 상황이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나는 새로운 세상으로 진입한 데서 온 일시적인 달콤함이 아닌 알맹이가 충실한 지속적인 재미를 욕망하기 시작했다.


이다혜 기자는 《출근길의 주문》에서 "자기 존재를 적극적으로 알리고자 하는 뛰어난 능력자도 사기꾼도 넘쳐나는 세상에서 언젠가 눈에 띄기를 기다리며 묵묵히 방망이 깎는 사람으로 늙어가겠는가?"라고 묻는다.


언제까지고 고상한 척 뒤로 물러나 있을 수는 없었다. 알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에 동아줄 하나 없이 던져진 신세라면 나 자신을 알리는 노력은 내가 직접 하는 수밖에 없었다.


노력이 직접적인 성과로 이어진 적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적도 있었지만 내가 뿌려 놓은 씨앗이 언제 어디에서 발아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현실을 다지기 위한 매일의 노동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무작정 덤비는 호기로움이 나에게 터닝포인트를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일이 진짜로 재미있어지는 건 바로 그 순간일 거라 생각한다. 인간관계가 그러듯 일은 나와 갑자기 가까워지거나 멀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서서히 가까워지거나 멀어지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을 내 쪽으로 확 잡아끄는 건 무언가 다른 시도를 해보겠다고 덤비는 나의 의지, 근거 없는 자신감 따위일 수도 있다.


요즘 내가 내 일이 재미있는 건 아마 그 때문일 거다. 능숙함의 세계로 넘어오면서 붙은 재미도 있지만 내 일이 뻗어나갈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할 때 나는 진짜 재미를 느낀다.




출판번역가는 이직이랄 것도 포트폴리오랄 것도 딱히 없는 데다 늘 '나'라는 최소 단위의 불안을 지고 갈 수밖에 없는 직업이다. 자신의 밥벌이가 가져다주는 경제적인 보상과 재미 따위를 두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셈이다.


하지만 그런 긴장감은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감각이 아닐까 싶다. 고정적인 직장을 다닌다 해도 그런 고민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니.


결국 나의 일은, 당신의 일은 우리가 무언가를 작당할 때 비로소 재미있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품은 채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유효할 재미를 모색해보는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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