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성이 게으르질 못했다. 엄마, 아빠를 닮아 그랬을 거다. 계속하다 보면 뭐라도 되겠지가 아니라 한 땀 한 땀 계획의 힘을 믿었고 성실함의 대가를 숭배했다.
회사를 그만둔 이후에도 나는 나였다.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하루에도 나는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돌아보면 열심히 하지 않은 날은 없었다. 이제는 안다. 다소 지루하게 굴러갔던 그 시간들이 쌓여 지금의 내가 있다는 걸. 별 게 아닌 게 아니었다.
그렇게 옆으로만 갈 뿐 위로는 영영 못 갈 것만 같던 지난한 시간을 건너 지금의 내가 되었다. 매 순간 나대로 살아온 결과였다.
아이러니해 보일 수도 있지만 내가 번역가를 선택한 건 허황된 것을 쫒기엔 겁이 많았기 때문이다. 일의 수급 문제는 있을지언정 자본 없이 시작할 수 있었기에 손해 볼 일도 없었고 그저 내 시간만 투자하면 되었다. 나의 성실함을 쌓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마흔을 앞두다 보니 안정이라는 것은 든든한 직장이나 쌓아둔 자산(물론 이런 것도 도움은 된다)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가 어떠한 일을 하면서 살지에 대한 그림이 확실히 생기면서 얻게 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반복은 그래서 중요하다. 시간이 켜켜이 쌓인 뒤에야 생기는 게 확신이다. 그리고 반복을 위해서는 성실함만큼 중요한 자질도 없다.
패스트푸드, SPA 브랜드가 난무하는 21세기에 성실함은 가장 시대착오적인 단어일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천마리의 학을 고이 접어 선물하는 등 사랑에도 성실함이 요구되던 때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시대다.
성실하다는 말이 언짢게 들릴 수 있는 세상이지만 성실함 하나 믿고 시작한 내가 번역가로 자리 잡은 데 일조한 자질을 단 하나만 꼽으라면 그것 역시 성실함일 것이다. 실력이 향상되었을 때에도 운이 따랐을 때에도 그 밑바닥에는 성실함이 있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 눈에 갑자기 성공한 듯 보이는 사람들의 삶에도 성실함은 늘 따라다녔다.
성실한 사람은 자신의 기초 체력을 튼튼하게 만든다. 그 결과 자신의 분야에서 경력을 쌓고 또 가끔은 우뚝 솟을 뿐만 아니라 조금 수가 틀어지더라도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
내가 지난 10년 동안 번역계라는 단단하지 않은 땅을 성실성 하나로 버티면서 얻은 교훈이다.
사실 출판 번역은 나가떨어지기 딱 좋은 분야다. 일의 수급 문제도 있고 돈벌이로서의 적정성 여부도 결코 가볍게 치부할 수 없는 직종이다. 그래서 출판 번역만 고집하기보다는 산업 번역이나 영상 번역 등 다른 분야에도 손을 뻗고 강의 같은 조금 다른 쪽으로 가지치기를 하거나 아예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이어나가는 경우도 많다.
나 역시 처음에는 산업 번역과 병행했으나 지금은 거의 출판 번역만 하고 있다. 내가 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러고 싶은 욕심이 있다. 남편만큼은 아닐지라도 경제 활동을 하는 하나의 인간으로서 스스로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고픈 욕망이 있다.
그러니 나는 앞으로도 쭉 성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앞으로의 길은 성실함 하나만으로는 쉽지 않을 수 있겠지만 기본기로서 성실함을 장착하는 일은 잊지 않기로 한다.
나에게도 어떠한 재능이 있다면 그건 작은 성실함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