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0원을 받기까지

by 물고기자리

새로 계약한 에이전시는 대형 에이전시답게 일이 많아 보였다.


샘플 번역에서 탈락하더라도 계속해서 샘플 의뢰가 들어왔고 나의 전공 때문인지 건축이나 인테리어 서적 등은 샘플 번역 없이 진행되기도 했다. 다만 아주아주 큰 단점이 있었으니 에이전시에서 가져가는 수수료가 굉장히 높은 데다 한 번에 주는 것도 아니고 번역을 완료해 넘기면 그로부터 3개월 후에 절반을 그리고 6개월 후에 남은 절반을 주는 구조였다(계약금은 당연히 없었다). 번역하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거의 1년 동안 수입이 전무할 수 있었다.


게다가 건축이나 인테리어 서적은 그림이 많고 내용은 적어서 초반 1, 2년은 책 한 권당 3, 40만 원 정도밖에 받지 못했다. 책 한 권에 1, 2개월이 걸린다는 걸 고려할 때 숨만 쉬어도 먹고살 수 없는 수입이었다.


하지만 그 전 에이전시에서 크게 디인 나는 꼬박꼬박 입금되는 번역료에 만족해하며 들어오는 책은 마다하지 않고 번역했다. 아직 역서가 몇 권 되지 않아 출판사와의 직거래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저 역서를 쌓는다는 생각으로, 안 버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는 일념 하나로 꾸역꾸역 버텼다.




그렇게 역서가 10권이 넘어가고 첫째 아이를 낳을 무렵부터 일이 잘 풀리면서 1인 출판사와 거래를 트게 되었다. 출판사 직거래는 주로 인터넷에 그들이 올린 글을 보고 내가 지원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1인 출판사는 외서 기획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고 또 아는 번역가 풀이 많지 않기 때문에 대형 출판사에 비해 거래가 수월한 편이다. 문제는 1인 출판사의 규모 상 1년에 출간하는 종수가 많지 않고 그나마 다른 번역가와 나눠 가져야 한다는 것. 그래서 한 출판사와만 거래해서는 손가락 빨기 딱 좋다.


그래도 출판사와 직거래를 하다 보니 수수료가 나가지 않아서 좋았다. 그렇게 수입은 계속해서 상승곡선을 그렸고 에이전시에서 주는 일은 할 시간도, 여유도 되지 않았다. 이렇게 서서히 에이전시와는 거리를 두게 되는구나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나를 이만큼 키워줘서 감사하지만 이제는 그 정도 돈을 받고 일을 할 수가 없으니 손을 놓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거였다.


하지만 둘째를 임신하고 출산하고 그렇게 두 아이의 엄마가 되는 동안, 상승하던 수입 곡선은 다시 후퇴하기 시작했다. 아이 때문에 일을 많이 못하게 된 나의 사정과는 별개로 야심 차게 출판 시장에 뛰어든 사장님들은 1년에 책 1권 내는 것으로 만족했는지 더 이상 기획된 외서가 없다 했다. 혹시 내 번역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해서 출판사 검색을 해봐도 다른 책이 다른 역자의 이름으로 번역되어 나온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단군 이래 매해 불황을 경신하고 있는 출판계의 사정이 한몫했으리라.


처음에는 우울했다. 이제 좀 안정적으로 일을 수급받나 싶었는데 전혀 아니올시다였다.


그러던 중 나의 경력이 어느 정도 쌓였는지 둘째를 낳은 이후 한 에이전시에서 먼저 손을 뻗어왔다. 조금씩이지만 꾸준히 나를 홍보한 보람이 있었다. 게다가 계속 거래를 해온 한 1인 출판사에서는 먼저 번역료를 올려주기도 했다.


그리고 올해 난 또 새로운 출판사 두 곳과 거래를 텄다. 내가 원하던 단가로.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시작이었던 번역료 3,500원을 나는 내 힘으로 10년 만에 얻어냈다.


그 뒤에는 체계적인 노력이 있었다. 일이 들어오면 무작정 하려던 초반과는 달리 나의 몸값을 지키기 위해 올해부터 의식적인 노력을 펼쳤다. 처음에는 내 실력에 자신이 없어서 상대가 단가를 낮추려면 마음이 약해졌다. 하지만 나보다 훨씬 실력이 낮은 누군가도 나보다 높은 번역료를 받으며 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힘이 불끈 났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번역료를 들이미는 클라이언트에게는 정중히 내가 원하는 번역료를 밝히고 거부 의사를 표했다. 내가 그렇게 노력한 데에는 이 바닥의 고질적인 문제, 낮은 번역료 문제를 시정하려는 마음도 한 몫했다.


번역가가 번역에 들이는 공과 시간을 생각하면 3,500원이라는 기본급여(?)도 결코 높다고 할 수 없다. 단가가 너무 낮게 측정된 것이다. 게다가 지금 4,500원을 받으며 일하고 있는 홍한별 번역가의 경우 번역료를 500원 올리는 데 5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 만년설처럼 더딘 속도에 기가 찰뿐이다.




이제 나에게는 그 속도를 거슬러 내 몸값을 높이는 일, 그리고 그에 맞는 실력을 갖추는 일이 남아 있다.


앞으로의 10년은 지난 10년보다는 나을 거라 조심스럽게 예견해 보지만 이 업계는 내게 또 어떠한 시련을 안겨줄지 모른다. 그래도 내가 미약하게나마 희망을 얘기하는 이유는 막막했던 길을 내 몸 하나 믿고 무작정 뚫고 나간 지난 10년과는 달리 이제 나에게는 장착된 무기가 많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 얻어낸 몸값의 역사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이 모든 조각을 가닥가닥 엮어 앞으로의 길을 어떻게 닦아 나아갈지는 나의 몫일 테다. 아무런 나아짐이 없다면 어쩐담, 하는 두려움이 없다면 거짓말일 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는 것, 또 좌절할 테지만 일단 나아가 보는 것. 그것만이 두려움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 아니겠는가. 뒤로 가는 건 아무래도 비겁해 보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