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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Apr 06. 2020

아픈 몸을 살다

해외살이 이야기

나에겐 지병이 하나 있다. 


지병이라 써 놓고 보니 뭔가 거창한 것 같지만 훨씬 더 무시무시한 병마와 싸우고 있는 이들도 있지 않은가. 심각도로 치면야 그런 병에 비해 감기에 가까운 병이다. 그래도 소위 지병인지라 내 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런 사이다.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에는 불치병 소녀라도 된 것 마냥 슬픔에 함몰되어 있기도 했고 애써 씩씩함을 가장하기도 했다. 당시에 내가 쓴 글에 맺힌 우울함이나 변덕은 아마 그에 기인했을 것이다.     




회사에 다니던 시절 내가 먹는 약과 똑같은 약 껍질을 정수기 옆 쓰레기통에서 보고 잠시 머뭇거린 적이 있었다. 나와 똑같은 병을 앓는 이가 이 공간에, 내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닭장과도 같은 곳에 있구나. 내 맞은편에 앉은 대리님일까, 화장실 건너편 인사조차 나눈 적 없는 다른 팀 과장님일까, 혼자 추축 해보기도 했다. 

       

나와 같은 지병을 앓고 있는 아이를 사랑한 적도 있었다. 그 사실을 안 건 이미 사랑에 빠지고 나서였다. 그 사실은 나를 그에게서 멀어지게도 더 빠지게도 만들었다. 이 병은 유전이 되는지라(물론 태어난 아이에게 백신을 맞히면 99퍼센트 괜찮다고 의사들은 말한다) 난 나중에 결혼할 배우자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말할까 늘 고민이었으므로 이 아이와 결혼하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20대를 방황하며 보낸 어느 날, 의사에게 임신은 되도록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말도 듣기도 했다. 그때쯤에는 이미 단단해질 대로 단단해져 있던 터라 환자를 수치로 밖에 보지 않는 그 의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지만 그 말은 나를 많이 아프게 했다. 아니, 나보다도 엄마를 더 아프게 했을 거다. 

     

엄마니까, 뭐든 줘도 아깝지 않지만 아픔만은, 상처만은 주고 싶지 않은 게 엄마의 마음이니까. 엄마가 아무리 노력해도 아이를 100퍼센트 보호할 수는 없건만 엄마들은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엄마의 역할은 쉽사리 내려놓아지는 게 아니다.      


나처럼 해외살이를 하고 있는 친구 하나는 자궁에 난 혹 때문에 몇 차례나 수술을 받았다. 난 그 친구가 남모르게 겪었을 몸의 고통, 마음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기에 누구보다도 친구의 건강을 염려했고 친구를 응원했다. 아픈 몸은 나를 괴롭히기도 했지만 나에게 삶의 굴곡을 견디는 단단한 방패와 남의 아픔에 공감하는 마음을 주기도 했다.          


한 번은 아이가 열성경련으로 쓰러진 적이 있다. 세 살이 될 때까지 크게 아픈 적 없고 평소 감기조차 거의 걸리지 않던 아이였다. 열이 나면서 비실거리던 아이는 함께 씻고 낮잠을 자자는 내 말에 옷을 벗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곧이어 다리가 푹 꺾이더니 그대로 쓰러졌고 연이어 몸이 뻣뻣해지며 흰자위가 휘번덕였다.


그 몇 분 안 되는 시간 동안, 나는 말 그대로 죽어 있었다.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댔지만 내 안의 시계는 아이의 발작이 있던 시간 동안 그대로 멈춰 있었다. 그 순간이 지속된다면 더 이상 살아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아이의 아픔으로 그 누군가는 나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줬고 나는 자신의 몸으로 낳은 한 생명을 인간이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을지, 나의 무능함에 날것 그대로 직면하게 되었다.     


그 날 나는 샤워부스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아이의 벌거벗은 몸을 부둥켜안으며 자지러지게 소리를 질렀는데, 그 모습을 본 엄마는 손녀 딸보다도 자신의 딸인 내가 어떻게 될까 봐 놀란 가슴을 움켜쥐었다고 했다. 그 날 샤워부스 안에는 자식의 아픔을 대신할 수 없지만 자식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느낀 두 모녀가 있었던 거였다.     

우리의 몸은 아프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의 관심을 받게 된다. 멀쩡히 돌아가는 몸의 한 부위가 탈이 나고서야 우리는 내 몸의 아픈 부위를 살피게 되는 것이다. 나병 환자가 다치는 이유는 신경이 훼손되어, 그러니까 아픈 것을 느끼지 못해 그 부위를 돌보지 않게 되면서라고 한다. 병 자체가 아니라 무감각해진 환자가 몸을 돌보지 않게 되는 것이 상처의 원인인 것이다. 아픔에도, 고통에도 이유가 있다.          




미국은 한국처럼 의료시스템이 체계적이지 않다. 전 국민이 비교적 저렴한 비용에 온갖 질병을 보장받을 수 있는 한국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어떠한 보험을 택하느냐에 따라 보장받을 수 있는 질병도, 범위도 다 다르다. 한 달에 1,000달러 가까이 내고도 또 의료비 폭탄을 선고받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게 되는 나로서는 속을 훤히 알 수 없는 요상한 시스템이다.       


뉴욕의 코로나 확진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지만 사실 보험이 없어 병원에 갈 생각조차 못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 수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럴 때면 몸이 아픈 것만으로도 부족해 마음까지 아프게 하는 자본주의적 시스템이 얄밉다.


우리는 언제든 아파질 수 있다. 언제든 아픈 몸을 살 수 있다. 코로나 시대를 사는 우리가 이 사태 속에서 잊지 말아야 진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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