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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Nov 04. 2020

집다운 집

마음에 안 드는 집에 온 이후로 책을 포함한 물건을 잔뜩 사들이고 있다. 집이 마음에 안 드니 물건으로라도 채워보려는 심보인가 싶었지만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었다.


이곳으로의 이사, 그러니까 마음에 안 드는 집으로의 이사는 나에게 집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월세로 300만 원이 지출되는 삶에서 나머지 것들은 가벼이 취급되기 쉽다. 그 안에 채우는 것에 욕심을 내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다. 그 달 월세를 내는 생활만으로도 버겁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이 집 곳곳에 자연스레 자리를 잡고, 시간이 쌓이면서 집은 그곳에 사는 사람을 잘 드러내 주는 공간이 된다.

                                                                                                                                       <집다운 집>


애초에 나를 드러내는 물건들이 있었다면 이 집에 와서도 덜 허전했을 텐데. 주위를 둘러보니 IKEA 가구들로 채운 무채색의 가구들이 눈에 띄었다. 책 이외에 내가 유난히 아끼거나 특별하게 취급하고 있는 물건은 없었다.


취향 없는 물건들은 마치 나의 취향 없음을 보여주듯 그렇게 덩그러니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비싸거나 대단한 물건이어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필요할 때 적절한 예산에 맞춰 대충 산 물건들은 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한 구석에, 아무의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로 놓여 있었다.


언제부터였나 모르겠나. 회사를 그만두고부터였는지 미국에 오고부터였는지. 무조건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물론 생각만큼 실천은 못했지만) 똑같은 물건이면 저렴한 쪽을 택했던 게.


비싸고 좋은 물건의 값어치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당장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물건에 호사를 부리는 건 사치처럼 느껴졌다. 그런 나의 행동들이 쌓이고 쌓여 오늘날의 내가 된 것이었다. 나 아닌 그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엄마가 말한 좋은 물건의 가치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을 잘 골라 오래 쓰는 것. 아무리 빨리 돌아가는 세상이라지만 그런 것들의 필요성이 존재하는 이유는 분명 있을 텐데.


무조건 비싼 게 좋다는 게 아니다. 하지만 누가 어떤 공정을 거쳐 만들었는지 꼼꼼히 파악하고 그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일 경우 게다가 나의 취향까지 겹쳐질 경우 조금 비쌀지라도 오래 함께할 생각을 품으며 거침없이 들여야 함을 지난 몇 년의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깨달았다.


집을 꾸민다는 건, 나의 취향을 반영한 공간을 만든다는 건 단순히 좋아하는 물건의 나열만은 아닐 거다. 그럼에도 시작은 작은 출발부터 하고 싶다. 그렇게 조금 오래 걸릴지라도 나의 취향이 반영된 물건을 꼼꼼히 골라 하나둘씩 공간에 보태다 보면 어디에 살든 나의 취향이 녹아든 공간을 꾸릴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기지 않을까.


아직은 시작 단계다. 최고요 공간 디자이너의 조언처럼 큰 예산을 들이지 않고도 가능한 부분부터 손대고 있다. 더불어 나의 취향을 알아가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도 해보고 있다.


가능한 오래 고심한 끝에 우리 집에 있어도 될 만한 물건, 내가 진짜 좋아하는 물건을 고르고 싶다. 물론 아이들 장난감은 제외지만.


집이란 자기 선택에 의해서 바꿀 수 있는 공간이다. 나의 선택과 취향이 반영된 공간은 곧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곳이 되고, 타인에 의해 쉽게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울타리가 되어준다.
 
                                                                                                                                         <집다운 집>




<좋아하는 곳에 살고 있나요?>에서 최고요 작가는 말한다.  


"사람마다 고유한 매력과 각자의 멋짐이 있듯이 집도 지닌 잠재력이 모두 다른 것은 아닐까. 그걸 내가 알아봐 주고 나라는 사람과 잘 어울리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지닌 잠재력을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걸 알아봐 주는 게 앞으로 나의 일일 것이다.


조금씩 내가 좋아하는 집의 '구석'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 집이 나와 닮아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 취향이 온전히 반영된 공간을 꾸리기 전에 이사를 가게 될지도 모르지만 이 집이 나의 취향을 쌓고 고군분투했던 흔적으로 기억되기만 해도 좋겠다.


그렇게 나의 취향을 쌓기 위해, 그래서 이 집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던 한 시절의 나 또한 소중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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