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고기자리 Oct 28. 2020

두 잔의 미지근한 라테

추운 가을날이었다.


겨울이 아직 온 건 분명 아니었는데 내내 살짝 덥기까지 한 가을날은 누군가를 만나기로 한 날 하필 매서웠다. 이쪽으로 20분 넘게 걸어온 그녀에게 미안하게 우리 손에 들린 커피는 금세 미지근해졌다.


누군가를 온라인에서 먼저 알고 실제로 만나는 건 싸이월드 시절 이후 처음이었다. 일로서 만나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사람이 궁금해서 만나는 건. 상대가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단 건 만난 지 5분 만에 알 수 있었다.


한국인은커녕 동양인조차 그리 많지 않은 이 동네에서 우리는 각자 살고 있었다. 어쩜 지나가는 길에 마주쳤을지도, 공원에서 산책하다 마주쳤을지도 몰랐다.




조곤조곤 하고 싶은 말을 내뱉는 그녀는 나보다 세 살 어렸지만 나보다 깊은 생각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는 사람, 하지만 너무 저만치 나가지는 않아서 함께 공감을 나눌 수 있는 사람, 책을 추천해 달라고 기꺼이 말하는 사람. 무엇보다도 그녀는 나처럼 목말라하는 사람이었다.


뉴욕에 온 이후로 처음으로 나 스스로 만든 인연은 기꺼이 품어주고픈 사람이었다. 나와는 달리 맨몸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해낸 당찬 사람이기도 했고.


그녀는 글에서와는 다른 모습도 내어주었고, 공간, 그리고 글, 책, 인생이라는 공통 주제로 우리의 대화는 막힘없이 흘러갔다. 추워만 아니었으면 그곳에 몇 시간을 있었을지 모른다.


헤어질 무렵 슬쩍 물어보니 나처럼 술까지 좋아한단다. 다음에는 와인을 들고 낮에 만나자며 호호 거리고 헤어졌다.  


헤어지고 나서 고개를 돌려보니 저만치 멀어져 가던 그녀도 몸을 돌려 손을 흔든다. 우리는 그렇게 점이 될 때까지 손을 흔들다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몇 시간 후 그녀가 올린 인스타 피드에는 #헤어질때뒤돌아봐주는사람#나보다손오래흔드는사람은처음 이라는 해시태그가 달려 있었다. 그걸 알아봐 주는 마음이 더 따뜻하고 고마웠다.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고 가족과 함께 다 같이 외출해서 나는 또 라테를 시켰는데, 오전의 미지근한 라테가 못내 아쉬워 따뜻한 라테가 마시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깜빡 잠들었던 아이가 갑자기 깨서 칭얼대는 바람에 집으로 빨리 이동해야 했고 약국에 들리고 마트에 들리고 집에 와보니 라테는 또 미지근한 상태였다. 두 번이나 라테에게 찬바람을 맞다니.




지금 그 미지근한 라테를 마시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만남이란 무엇일까. 대화 중에 그녀는 말했다. 이제는 내 인생에 잠깐 들어오든 길게 들어오든 모든 인연의 순간적인 만남을 소중히 여기고 싶다고.


그렇게 서로에게 마음을 내어준 우리는 이제 함께 이 동네에 사는 사람이 되었다. 아무래도 오래 보게 될 것 같은 사람.


라테는 미지근했지만 우리의 만남은 뜨거웠으므로 그걸로 충분한 하루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집에게 하는 부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