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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Sep 06. 2020

내 집에게 하는 부탁

새로운 집에 이사 온 지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8월이 열리는 날 왔으니 한여름에 와서 아침저녁으로 가을이 설핏 느껴지는 가을의 문턱에 다다른 셈이다.


이사하고 몇 주가 지나도록 짐을 풀지 못했다.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시와 산책>에서 이 문장을 본 순간 내 얘기인 줄 알았다. 아이들 때문에 또 코로나 때문에 괜찮아 보이는 1층 집이 보이길래 바로 결정을 내렸으나 급한 결정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랐다.




집에 앉아서는 하늘이 보이지 않았고 창문은 답답하기만 했다. 아이들 때문에 설치된 안전장치는 창살처럼 느껴졌다. 고개를 비틀어 쭉 잡아 빼면 하늘 한 줌이 비웃듯이 나를 내려다봤다. 낮에도 어두컴컴한 방은 우울증 걸리기 딱 좋았다.


그러다가 쥐가 나왔다. 쥐라면 이미 이골이 났지만 가뜩이나 마음에 안 드는 집에서 쥐까지 보니 이곳에 정이 붙이기는 글렀다 싶었다. 어찌 저찌 쥐 문제를 일단락(?)지었지만 마음은 갈 곳을 잃고 계속 방황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블라인드를 닫는데 앞 건물에 환히 불이 켜진 창이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 한 분이 식물을 창가에 늘어놓고 정성스럽게 물을 주고 있었다. 눈은 다른 창가로도 향했다. 다들 한 줌의 햇살이라도 더 받으려고, 한 줌의 초록이라도 더 느껴보려고 창가에 갖가지 화분들을 전시해 놓고 있었다. 나처럼 책을 좋아하는 누군가가 살고 있는지 또 다른 창문 한 쪽으로는 한가득 쌓아 놓은 책이 보이기도 했다. 호퍼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처럼 이 외로운 도시에서 각자 저마다의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겨울을 겨울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당연한 듯해도, 돌이켜보면 그런 시간을 갖지 못한 적이 더 많다. 봄의 마음으로 겨울을 보면 겨울은 춥고 비참하고 공허하며 어서 사라져야 할 계절이다. 그러나 조급 해한들, 겨울은 겨울의 시간을 다 채우고서야 한동안 떠날 것이다. 고통이 그런 것처럼.
                                                                                                                           -시와 정원, 한정원


생각해 보면 늘 겨울이 다가오는 걸 조금은 두려워했던 것 같다. 3시만 되면 어둑해지는 뉴욕에서 겨울은 인내해야 하는 계절이었다.


겨울을 겨울의 마음으로 바라봐야 한다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겨울이 자기 시간을 다 채우고서야 떠날 것처럼 이곳에서의 시간도 그럴 것이다. 내가 조급증을 갖고 대하면 봄이 쏟아진다 한들 이곳에서의 하루는 감옥에 불과할 거다.




아직은 이곳과 어떻게 화해해야 할지 내가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야 할지 모르겠다


겨울이 자신의 시간을 다 보내고 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처럼 나와 이 집이 서로를 찬찬히 알아가도록 시간을 내어줄 것인지, 그러다가 견디다 못한 어느 한쪽이 먼저 결별을 선언할지 아직은 모른다.


어느 쪽이든 내가 한 때 살았던 집으로 기억될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니 답은 나왔다. 선택도 이미 끝났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이곳을 떠날 때 그래도 우리 가족이 잘 지내다 갔다, 생각은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 삶에서 특정한 부분만 도려내어 기억할 수 없을 테니.


집의 장점을 억지로 나열해보는 일 따위는 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다. 그래서 부탁하기로 했다. 나를 좀 잘 봐달라고. 집도 아마 나에게 그런 부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내가 귀 기울여야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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