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고기자리 Nov 06. 2020

예쁘장한 역서의 나만 아는 이면

새로운 역서가 출간되었다.


작년과 올해 작업한 책들이 계속 출간이 미뤄지면서 올해는 한 권도 출간되는 책이 없나 했는데 느지막이 한 권이 반가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런데 아무리 1년이 지났다지만 아무리 읽어도 내가 쓴 글 같지가 않았다. 너무 이상해서 목차랑 본문을 대충 훑어봤는데 볼수록 이상했다. 결국 마지막으로 에이전시와 주고받은 수정 파일을 뒤져서 일일이 확인해 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출판사에서 대대적인 수술을 감행했던 것!


요새 팔리는 트렌드에 맞춰 예쁘장한 책으로 재탄생(?)된 책을 바라보니 흐뭇하기도 하면서 한 구석이 시렸다.




번역가의 역할은 어디까지일까. 에이전시와 거래할 경우 출판사에서 수정 작업이 생기더라도 웬만하면 번역가 손에 다시 돌아오는 경우가 적다.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출판사에서 자체적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고 이번 건처럼 대대적인 수술이 이뤄지고도 번역가에게는 그 사실이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 그런데 조금씩 손을 보는 경우는 많지만 이렇게 다 뜯어놓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물론 단순한 자기 계발서에 불과했을 책을 인문서 중 교양 심리학 책으로 둔갑(?)시켜 새로이 탄생시킨 건 누가 봐도 훌륭한 일이다. 표지도 내가 여태껏 작업한 어떤 책보다도 상큼하고. 요새 트렌드에 맞춰 일러스트도 간간히 삽입한 게 누구든 손으로 한 번쯤은 가져가 볼 법하게 생겼다.


근데 번역가인 나는 그 너머를 알고 있기에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다.


번역가는 번역문을 넘기고 나면 그냥 끝일까? 저작권을 요구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딱히 이렇다 할 주장을 펼칠 수는 없겠지만 볼일 본 뒤 안 닦고 일어선 듯한 이 기분은 어찌한단 말인가.


어떠한 에이전시는 계약을 맺을 번역가가 해당 출판사와 직거래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도 포함시킨다. 출판사와의 거래를 원천 봉쇄하려는 속셈이겠지.


아직 번역가가 가야 할 길이 멀다.




출판사야 책이 많이 팔리면 그만이겠지만 에이전시야 수수료를 챙기면 끝이겠지만 여기에서 어중간하게 낀 번역가의 위상은 누가 챙겨준단 말인가.


문제는 번역하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리고 그중에는 저자세로 나오는 사람들도 많아서 나 같은 사람이 아무리 주장해봤자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동료들을 설득하는 수밖에.


우리 모두 자존심을 조금씩 더 챙겨가며 일합시다!!!


그래도 책 홍보는 하고 가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모든 기회를 잡을 필요는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