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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Jan 16. 2021

유모차의 날들

아이가 한 명밖에 없었을 때에는 오전 내내 주로 아이 옆에서 바닥에 앉아 일을 했다. 내 옆에만 꼭 붙어 있으려는 아이 때문에 답답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옆에만 있어주면 잘 노는 아이가 기특하고 고마워 감사한 마음으로 일했다. 아이가 두 돌이 지났을 때부터는 오후가 되면 아이를 데리고 밖에 나가야 했다. 아이가 집에서는 낮잠을 자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집에서 재우려는 시도가 몇 주 연속 실패하자 나는 점심을 먹고 2시에서 3시 사이에 무조건 유모차를 끌고 나갔다. 유모차의 짐칸에는 노트북이 실려 있었다.


아이는 내가 커피숍을 향해 걸어가는 15분 남짓한 시간 동안 잠이 들기도 했지만 커피숍에 다 와 가는데도 눈을 말똥말똥 뜬 채 나를 올려다보기도 했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아이가 잠들 때까지 동네를 몇 바퀴고 돌았고 그럼 아이는 결국 잠이 들곤 했다. 잠든 아이가 깰라 조심스레 커피숍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은 나는 한국에서 가져온 벽돌 같은 노트북을 열고 일을 했다. 아이가 자는 시간은 너무 소중해 아껴 먹고 싶은 간식 같은 것이었으나 맛있는 것이 눈 깜짝할 사이 사라지듯 그 시간은 너무 금방 지나갔다.


커피를 홀짝이며 일을 시작한 지 한 시간쯤 지나면 아이는 칭얼대며 눈을 떴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를 안아 들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엄마의 품이 편안한지 아이는 다시 스르륵 눈을 감을 때가 있었는데 그러면 나는 아이의 무게와 오르내리는 숨결을 고스란히 느낀 채 팔만 간신히 뻗어 다시 일을 했다.


그 시절의 내가 생각난 건 노지영 번역가의 에세이 《먹고사는 게 전부가 아닌 날도 있어서》를 읽으면서였다.


“합정역 5번 출구 앞에서 검은색 코트를 입은 친구를 보고 몇 년 전 송년회와 그날 내가 입었던 옷이 떠오르는 것처럼, 서랍을 열었다가 구석에 놓인 다이어리를 보고 비 오던 광화문을 헤매던 기억이 나는 것처럼, 가끔 어떤 이름이나 단어 하나를 보고 그 번역을 했던 과거의 나를 만나고 그 번역을 하면서 내가 느낀 즐거움과 괴로움을 상기한다.”


나 역시 뉴스에서 옛 동네의 사진이나 이름이 나올 때면 유모차를 타고 다니던 첫째 아이와 그 아이를 데리고 일을 하던 내가 떠올랐다. 내가 그때 하던 번역이나 쓰던 글은 물론 둘째 아이가 없었을 때 내가 첫째 아이에게 느꼈던 감정까지도 고스란히. 단어 하나로 물밀 듯이 밀려온 추억에 빗장이 풀린 나는 당시 아이의 사진까지 찾아보며 지나간 시간을 추억하기도 했다.


그 시절 일하는 엄마 옆에서 유모차에 누워 곤히 자곤 했던 아이는 어느새 20분을 걸어 유치원으로 등교하는 아이가 되었다. 엄마가 일하느라 바빠 동네 앞 놀이터에도 자주 나가지 못했던 아이는 그래도 큰 불만 없이 잘 지내주었다. 잠시라도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그야말로 독박 육아를 해야 했던 그 시절, 아마 아이가 나에게 유독 집착하는 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로 밖에 모르던 시절을 서로에게 기댄 채 건너왔기에.


첫째 아이는 나에게 유독 시린 이 같은 존재다. 처음이라 엉성하고 모르는 것 투성이인 엄마의 첫 번째 실험 대상이었으니. 지금도 아이는 첫째로서 엄마의 서투른 행동을 다 받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엄마도 집에서 일하는 엄마로 사는 건 처음이라는 것을 아이는 알까.


내 아이의 곁에서 일할 수 있는 건 분명 큰 축복이다. 집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아이가 자라는 매 순간을 놓치지 않고 목격할 수 있다. 일하는 데 방해가 되는 존재가 아닌, 나의 사랑하는 아이로만 놓고 바라보면 이렇게 훌쩍 자라 버리는 것이 못내 아쉬울 때가 많다. 그럴 때면 세상의 모든 부모가 그렇듯 빨리 커버렸으면 싶으면서도 또 그만 컸으면 싶은 모순적인 감정에 갇히고 만다.


목욕을 시키며 부쩍 길어진 핑크빛 허벅지를 볼 때,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괜찮아 보였던 옷의 소매가 짧아져 있는 것을 볼 때 나는 속절없이 “정말 많이 컸다”라는 말을 내뱉는다. 그러면 첫째 아이는 그만 크고 싶다며 아기 코스프레를 하지만 나의 바람, 아이의 바람과는 달리 아이의 몸은 자고 나면 또 미세하게 자라 있다. 그래도 그 모습을 전부 목격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밖에 나가 일을 했더라면 지금쯤 많은 것을 놓쳤을 터다. 아니 그 순간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 내 일을 그만뒀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의 불만은 복에 겨운 소리일지도.


가끔, 혼자여서 여유 있었던 나를 떠올린다. 통번역대학원 입시 시절, 학원 수업을 마치고 근처 커피숍에 가서 베이글에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공부를 하던 나. 집에 두고 온 아이나 유모차에서 자고 있는 아이를 염려할 필요 없이 누군가와 뜨거운 커피를 사이에 두고 마음껏 수다를 떨던 나. 친구와의 약속 시간 1시간 전에 미리 서점에 가서 책을 읽던 나. 커피숍에 앉아 하염없이 지나가는 사람을 쳐다보던 나. 시간 부자였던 나. 내 몸 하나만 건사하면 되었던 나. 지금의 내가 너무 낯선 날이면 어김없이 그때의 나를 소환한다. 그게 얼마나 홀가분한 일인지 몰랐던 나에게 다가가 어깨를 톡 치며, 지금을 마음껏 즐기렴. 너의 시간을 마음껏 누리렴, 하고 귓속말을 건네고 싶다. 시간 귀한 줄 몰랐던 과거의 내가 흘려버린 시간을 주워 담아 지금의 나에게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분명 지금 이 순간도 머지않아 그리워하게 될 거다. 더 이상 끌어야 할 유모차가 없어지면 둘 곳을 잃은 두 손이 허전해질 테고. 그러니 오늘도 잊지 않겠다. 하루가 전쟁 같고 매일이 거기서 거기 같은 일상이지만 이 시간조차 다시는 반복될 수 없음을. ‘언젠가’를 상상하며 건너는 하루도 힘이 되지만 나의 눈길이 오래 머물러야 하는 곳은 ‘지금’ 내 옆의 아이들임을. 머리속 생각은 그렇지만 믹스커피를 탄 커피 잔을 흔들어대는 아이들에게 나는 오늘도 제발 커피만이라도 혼자 마시게 해줘, 라고 목청껏 소리를 지른다. 좋은 말 할 때 엄마 좀 내버려 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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