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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Jan 14. 2021

아이가 태어났다.

첫째 아이가 태어났을 당시 나는 출간된 역서가 10권이 채 되지 않은 초보 번역가였다. 주 거래처는 에이전시. 한 권 번역하면 100만 원이 채 되지 않는 돈이 들어왔다. 나조차도 온전한 직업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없는 일을 꾸역꾸역 하는 가운데 엄마가 되었다. 아이의 젖을 물리며 생각했다. 이 아이가 말을 할 때쯤이면 상황이 나아지겠지. 아이에게 엄마가 하는 일을 당당히 말해줄 수 있어야 할 텐데.


아이에게 밤새 젖을 물리는 일은 잠 많은 나에게 고역이었지만 모든 엄마가 하는 일이니 나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유별난 모성애가 있을 리 만무했으니 우선은 고비를 넘기자는 생각이 컸다. 차차 나아지겠지, 라는 마음과. 그러니까 그 무렵의 나는 일도 육아도 둘 다 차차 나아질 거라는 낙관도 비관도 아닌 미지근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몸이 피곤했으므로, 신생아와 함께 하는 하루는 이미 스펙터클 했으므로 특별한 열정이 싹틀 여유가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열정은 생각보다 일찍 새싹을 트였고, 아이가 태어나기 일주일 전 산간을 위해 한국에서 오신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아 나는 아이를 낳고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다시 일을 시작했다. 열정이라기보다는 항상성 때문이었을 거다. 그냥 해오던 일이었으니, 노트북만 열면 바로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 예열이 딱히 필요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 그냥 했을 뿐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덤덤하게 말하지만 그때의 나는 사실 무척 불안했다. 일이 끊길까 봐. 가뜩이나 띄엄띄엄 들어오는 일이 아예 뚝 끊기고 말까 봐. 그 불안감 때문에 시린 손목을 부여잡고 아이가 자는 틈을 타 꾸역꾸역 일을 했다. 내가 어떻게 시작한 일인데, 이렇게 멈출 수는 없다고, 나를 다독여가며 일을 했다.

크게 무리하지는 않았다. 무리한 일정으로 의뢰가 들어올 만큼 당시의 내가 잘 나가는 번역가는 아니었다. 에이전시 담당자는 나의 사정을 알기에 일정이 넉넉한 프로젝트만을 소개해주었고, 나는 감사한 마음에 상황이 허락하는 한에서 조금씩 다시 일을 받기 시작했다.


엄마가 가고 온전히 아이와 둘이서만 하루를 보내야 하는 상황이 오자 다시 새로운 루틴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엄마 껌딱지인 첫째 아이는 옆에만 있어주면 내가 일을 하는 데 크게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그 아이를 옆에 끼고 들어오는 대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렇게라도 일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2년 반 후 둘째가 태어났고 이번에는 젖먹이 둘째와 한창 미운 세 살인 아이를 데리고 일해야 했다. 한 손으로 젖을 물리고 다른 손으로 키보드를 치는 가운데 첫째 아이의 비위를 맞춰가며 일을 했다. 아직은 손이 많이 가는 어린 아기와 민감한 첫째 아이의 수발을 들어가며 내 일을 하는 것은 아이가 한 명일 때보다 훨씬 고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관성처럼 그렇게 나는 꾸역꾸역 또 일을 해나갔다.


하지만 옆에 있으면서도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놓치고 있는 듯하다는 생각이 드는 날에는 끝없는 생각의 소용돌이에 빠지기도 했다. 옆에 있어준다고 다는 아니지 않은가? 지금의 나는 진짜 그냥 옆에만 있어주는 거 아닌가? 내 일을 하는 게 이기적인 일은 아닐까? 그렇지만 나의 미래에 투자하는 일이, 나의 성장 가능성을 높이는 일이 어떻게 이기적인 일일 수 있을까? 남편은 이런 생각을 안 하지 않을까?


돌이켜보면 돌봄 노동의 경제적인 가치가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나의 경제적인 가치를 높이기 위한 욕심이 컸던 것 같다. 사회구조적인 문제였고 분명 시정되어야 하는 문제였지만 나 스스로도 집안일이나 육아보다는 나 자신을 알릴 수 있는 일에 더 높은 경제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다(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집에서 논다는’ 말만큼 부당하고 차별적인 말도 없다. ‘일하지 않는 여성’은 없다.)


나의 일에 경제적인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노력은 집 안팎으로 이어졌다. 가정 내에서는 내 일을 하는 시간을 확보해야 했고 집 밖에서는 번역가라는 개인으로서의 몸값을 높이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다. 그 가운데 아이들은 어떤 식으로든 결핍을 경험했을 것이다.


불안감과 죄책감으로 얼룩져 있던 나를 위로한 것은 《엄마로 태어난 여자는 없다》라는 책에서 저자 송주연이 인용한 칼 로저스의 말이었다. “칼 로저스는 자기 자신을 어떠한 틀에 끼워 맞추려 하지 않고, 경험하는 그대로의 모습을 ‘나 자신’으로 수용할 수 있을 때 사람은 보다 온전해진다고 했다.” 나는 밖에서 일하는 워킹맘도 아니고 집에서 가사와 육아에만 전념하는 엄마도 아니었다. 어느 한쪽에도 끼지 못하는 애매한 상황에 늘 불안했던 나는 나에게 주어진 상황에 맞춰 내 방식대로 아이들을 돌보며 일하는 방식을 인정함으로써 내가 더욱 온전해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글 속에서 나는 일종의 구원을 받았는데 이대로 잘하고 있다고 지금의 내 상황은 나만이 그릴 수 있는 지도 같은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 공간에서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하는 일은 어떤 면에서 나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번역을 하다가 잘 안 풀릴 때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아이들의 포동포동한 살을 어루만지며 위로를 받았다. 일 때문에 머리가 아플 때에는 아이들의 미소와 무조건적인 사랑만큼 효과적인 약도 없었다. 아이를 꼭 껴안을 때 나의 심장에 겹쳐지는 작은 심장의 두근거림은 매 순간 새로웠다. 하지만 이 꼬마 악마들이 질러대는 소리 때문에 고막이 터질 듯한 순간은 예외 없이 찾아왔고 그럴 때면 빈 종이가 채워지는 정직한 일만이 나를 위로했다. 그런 순간이 찾아오면 나는 나만의 세계에 빠진 채 내 마음을 매만졌다.


이 고백은 어떻게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얼핏 보면 상호공존이 불가능해 보이는 이 두 일은 사실 서로를 보듬어주고 있었다. 내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시소의 양끝에서 균형을 맞춰주고 있었다. 그러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음소거가 아니라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리듬에 맞춰 다소 어색한 춤을 추는 일이겠다.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일지도 모르는 그 몸짓에 의미가 있다면 그건 진부하지만 한 인간의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향한 몸부림이자 그 둘을 어떻게든 함께 갖고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 다름 아닌 부지런한 사랑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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