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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Jan 28. 2021

배우와 번역가의 공통점

나는 나의 직업이 배우라는 직업과 공통점이 참 많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매우 혼자인 사람들의 일하기》를 읽다가 아, 진짜잖아, 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 책에는 신견식 번역가와 김택규 번역가의 이야기도 나오지만 두 분은 나와는 워낙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분들이라 공감하기가 쉽지 않았고 내게는 오히려 이 쪽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연극배우 리우진 님의 일상을 읽으며 나의 일상을 대입해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일단 아침에 일어나서 편한 옷을 입는다. 연극배우 리우진 님께서는 연습실로 가지만 번역가인 나는 책상 앞에 앉는다. 그가 대본을 볼 때 나는 원서를 보고, 그가 온몸으로 대사를 외우며 이렇게 살려볼까 저렇게 살려볼까 할 때 나는 이 문장은 이렇게 번역해 볼까 저렇게 번역해 볼까 궁리한다.


“꾸준히 걷고 걸으면 그 유명 배우처럼 될까”라는 말은 꾸준히 읽고 번역 공부를 하면 그 유명한 번역가처럼 될까, 라는 나의 생각과 겹쳐 보이고 “거의 500번의 오디션을 봤지만 합격해서 실제 촬영까지 한 작품은 한 손에 꼽을 정도”라는 말에는 나는 그 정도까지 메일을 보내거나 기획서를 돌려본 적은 없는데 혀를 내두르면서도 그 좌절감을 알 것만 같아 서글퍼진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쌓아 올린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포트폴리오를 끊임없이 갱신해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닮아 있다. 자신이 원하는 작품에 참여하고 싶지만 그런 기회가 늘 나에게 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 우연히 참여한 작품에서 좋은 경험을 하기도 한다는 점도. 무엇보다도 가난한 것마저 우리는 비슷하다. 그래서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사람이 많다는 점도.


작업실로 향하는 길 남대문 시장을 가로질러 가 자신의 역할에 맞는 의상과 소품이 있지 않을까 싶어 둘러보는 그의 모습에서는 나중에 다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며 책을 읽는 내가 보였다.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들이 내뿜는 시장의 활기에 묘한 자괴감을 느끼며 불규칙한 작품 활동과 수입 탓을 하는 것마저 어쩜 그리 비슷한지!


그의 글을 읽다가 궁금해져 네이버에 인물 검색을 해보았다. 연극계에서는 유명하지만 영화에서는 주로 형사 1, 간부 3 등의 역할을 맡은 그를 보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는 사람만 아는 그 서러운 입지. 하지만 그의 말에 따르면 리우진이라는 배우가 있다는 걸 연극계의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고 한다. 악착같이 버텨온 세월의 힘 덕분이라고. 그가 20년을 버텼으니 나도 10년 더 버텨보면 달라질까. 프로필 사진을 찍고 프로필을 업데이트하는 그의 모습은 역서가 나올 때마다 이력서를 부지런히 업데이트하는 내 모습과 뭐가 다르겠는가. 읽을수록 그에게 빠져들며 그라는 한 인간이 가깝게 느껴진다.


물론 그의 하루는 정적인 나의 하루와는 다른 온갖 동적인 활동들로 이루어진다. 혼자서 일하는 나와는 달리 다른 배우들과 호흡을 맞춰야 하고(그런데 그가 왜 혼자 일하는 사람들을 주제로 한 이 책에 글을 쓴 것인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춤과 무술, 승마 등을 배우러 다닌다(정확히 말하면 승마를 제외하고는 다녀야 한다고 생각만 하고 있다. 여기서 또 한 번 공감).

춤에 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춤은 비단 기분을 업시킬 뿐만 아니라 몸의 유연성을 기르고, 지구력을 기르고, 근력을 기르고, 박자 관념을 기르고, 음악에 몸을 맡기는 몸의 흐름을 익힐 수 있다는 점에서 배우들에게는 굉장히 좋은 트레이닝 수단이다.” 나는 여기서 또 한 번 크게 공감하는데 일하는 내내 자리에 앉아 있는 번역가들에게 필요한 게 바로 이 같은 몸동작이 아닐까 싶어서다.


아이들이 춤추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반드시 따라오는 생각이 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춤을 추기를 꺼려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집 밖에서는 움츠릴 수 있겠지만 최소한 부모 앞에서는 거리낌 없는 몸짓을 선보인다. 어른이 된 우리 역시 한 때는 그러했을진대 언제부터 몸을 사리게 되었을까. 우리의 몸짓은 언제부터 어색해졌을까.

잠시 딴 데로 샜는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의 요지는 이거다. 춤이든 단순한 스트레칭이든 내 몸을 혹사시키기 딱 좋은 직업인 번역가에게는 잠시의 육체적인 움직임, 그러니까 몸의 휴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뽀모도로 기법이라는 시간 관리법이 있다. 프란체스코 시릴로라는 사람이 대학생 시절 토마토 모양으로 생긴 요리용 타이머를 이용해 25분간 집중 후 5분 휴식하는 일처리 방법을 제안한 것으로(뽀모도로는 이탈리아어로 토마토라는 뜻이다) 많은 프리랜서가 이 방법을 40분 동안 일을 하고 20분을 쉬는 식으로 변형해서 활용하고 있다. 한 자리에 너무 오랫동안 앉아 있게 되는 프리랜서가 스스로에게 쉼을 주는 한편 집중력을 높이는 방법인 듯한데 나에게는 토마토 모양의 타이머가 필요 없다. 그보다 훨씬 귀여운 타이머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아이들이다. 내가 조금 오래 앉아 있다 싶으면 아이들이 나타나 나를 이리 끌고 가고 저리 끌고 가려고 애쓴다. 25분 동안 앉아 있지 못할 때도 많다. 아이들은 꼬마 악당 마냥 놀아 달라 먹을 거 달라 이런저런 요구를 한다. 그 요구가 못내 귀찮을 때도 있지만 내 아이를 외면할 수만도 없는 게 엄마인지라 결국은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인다. 그 잠깐의 시간은 책상에만 앉아 있을 뻔했던 나에게 환기의 시간이 된다. 25분과 5분으로 명확히 나눌 수는 없지만 아이들 덕분에 내 하루에는 자연스럽게 쉼이 자리한다.


대학원 동기 중에 춤을 추는 친구가 있다. 그냥 취미로 추는 게 아니라 전문적인 직업인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가끔 그 친구가 춤을 추다가 자리에 앉아 번역을 하고 다시 일어나 춤을 추는 모습을 상상한다. 같이 춤추는 남편을 만나 매력 만점인 아이를 낳은 그 친구가 출산 직전까지 만삭의 몸으로 춤을 췄던 모습을 떠올리면 언제고 기분이 좋아진다. 춤과 번역, 정말 꿀 같은 조합 아닌가? 몸을 조금 더 화끈하게 써보고 싶은 번역가라면 올해는 춤을 좀 배워보면 어떨지. 리우진 배우님의 말처럼 지구력, 근력, 유연성 향상에 좋은 춤은 기분을 업시켜 주기도 하니 정적으로 흘러가는 번역가의 정신 건강과 신체 건강에도 분명 이로우리라.


그나저나 리우진 배우님은 내가 자신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것을 아실까. 앞으로 리우진 배우님의 필모그래피를 팔로우 해야지. 그이가 잘 살고 있으면 나도 잘 살게 될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담아 멀리서나마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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