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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Feb 09. 2021

해외에서도 일만 잘합니다

미국에 오기로 결정한 이후 내 일이 걱정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아무 곳에서나 일 할 수 있다는 것과 그 일을 받을 만한 창구를 뚫는 것은 다른 일이었으므로. 하지만 일하는 데 지장이 있었나 돌아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어차피 대부분의 번역 의뢰는 온라인으로 들어오고 마감이 넉넉한 장기적인 일이다 보니 실시간으로 연락해야 하는 일도 드물다. 굳이 따지고 보면 오히려 도움이 된 부분이 많다. 온라인으로 어떻게든 홍보하려고 애쓰다 보니 그쪽으로 원체 부족하던 나의 약점이 보강되는 면도 없잖아 있다. 


게다가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미국 문화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가 생긴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어차피 서울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도시에 살고 있어서 중서부 지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은 여전히 낯설지만 그 낯섦의 거리가 한국에 살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가까워졌다. 개인 정원이 딸려 있는 대저택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은 방 한 칸짜리 집에서 흙냄새 따위는 맡을 수 없는 나의 일상과는 하늘과 땅 끝 차이지만 같은 시간에 아침과 저녁을 맞이한다는 감각만으로도 그들과 한층 가까워진 기분이다. 책에 등장하는 고유명사가 나의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일 때, 번역문과 나와의 거리가 한 뼘 가까워지는 것도 사실이고. 


현지에 살면 책을 기획하는 일도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는 수월하다. 아마존에서 중고책마저 쉽게 사볼 수 있고 도서관에서 빌려볼 수도 있으며 한국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곳에서는 팬 층이 두터운 저자를 발견할 확률도 높다. 줌파 라히리의 책을 번역한 박상미 역시 브루클린에 머물면서 줌파 라히리를 발견해 한국에 소개했다. 마크 스트랜드의 《빈 방의 빛》도 그렇게 빛을 보았고. 아직 한 번도 성공적인 발굴을 해본 적이 없지만 마음속에는 늘 ‘언젠가는’을 품고 있다. 줌파 라히리 같은 번역가를 찾아 한국에 소개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혼자 김칫국을 마시기도 한다. 어찌 됐든 내가 이곳에서 못하는 일이 아니라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에서 가능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해외에서 일하다 보니 많은 부분이 단순화된다. 두 아이를 보며 일하느라 그럴 여유도 없지만 한국과의 시차 때문에 애초에 번거로운 일들을 벌이지 않게 된다. 하려면 할 수 있겠지만 굳이 뭐 거기까지, 하며 스스로 한계를 짓게 된달까. 요즘 같은 자기 브랜딩 시대에 참으로 안이한 전략일 수 있지만 그래도 나름 일이 끊이지 않으니 이 정도면 해외에서 잘하고 있는 것 아닌가.


최근에는 뉴저지에 기반을 둔 출판사와 거래를 맺었다. 내가 뉴욕에서 출판사와 계약을 하는 날도 오다니 감회가 새롭다. 소개를 받은 거라 나의 브랜딩 전략(그런 게 있기라도 하다면)이 효과를 본 거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동안 쌓아 올린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던 거다.


번거로운 일은 벌이지 않으려 하는 나이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홍보는 한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나는 어떠한 번역가인가. 포장이라는 말은 거부감이 들지만 어떠한 번역가라고 나 자신을 소개해야 할까, 어떠한 번역가로 나를 키워내야 할까에 대해서는 늘 생각한다.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에서 이라영은 말한다. “몸을 움직여 이야기를 전하러 가는 그 ‘북우먼’들처럼 나도 꾸준히 몸을 움직이고 생각을 움직이는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 그렇게 성실하게 세계를 확장하는 것이 아름다움이라 믿는다”라고. 그가 말하는 ‘북우먼’은 1940년대에 한 달에 28달러를 받으며 일주일에 193킬로미터의 산길을 말을 타고 다니며 책을 나르는 일을 했던 여성들이다. 그들은 단순히 책만 나른 게 아니라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서비스까지 제공했다. 서재와 도서관 바깥으로 뻗어나간 존재들을 보며 저자 이라영은 일상에서 ‘북우먼’이 되고 싶다는 유혹에 빠진다고 말한다. 


나 역시 비슷한 꿈을 품고 있다. 다양하고 구체적인 타인의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가 닿을 수 있도록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싶다. 특히 알려지지 않은 여성의 이야기를.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어떠한 수식어로 표현해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시간이 더 필요한 거다. 우선은 더 많이 읽고 생각하고 싶다. 타인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생각의 결을 촘촘하게 짤 줄 알아야 할 테니.


<큰일은 여자가 해야지>라는 팟캐스트를 즐겨 듣는데, 한 화에서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무언가 새로운 일이 주어졌을 때 여자들은 ‘내가 그걸 할 수 있을까?’를 먼저 고민하지만 남자들은 일단 하고 본다고. 그런데 그냥 하다 보면 정말 늘고 결국 그 일을 잘하게 된다고. 나도 그랬다. 조금 어려워 보이는 책을 맡으면 내가 할 수 있을까, 라며 걱정을 앞세웠다. 나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을 겸손이라 착각했다. 하지만 막상 해보면 어떻게든 해내곤 했다. 그렇게 자신감을 키워갔다. 두 진행자의 말마따나 나 역시 조금 더 “나대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더 많은 여성 번역가가 나대는 세상을 꿈꾼다. 큰일은 여자가 하는 세상을.


무슨 일을 할 때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나라는 번역가를 요약해줄 만한 키워드가 있어야 할 것이다. 나라는 번역가를 대표하는 키워드는 뭘까. 죽었다 깨도 N잡러는 못 될 것 같고 빵을 자주 굽는 것도 아니니 인스타에서 만난 한 번역가처럼 빵 굽는 번역가도 못 될 거다. 억지로 만들고 싶지는 않지만 무슨 생각이든 처음에는 약간의 억지가 필요한 법이니까. 

나의 키워드는 뭘까, 고민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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