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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May 28. 2021

그래서 출간은 언제쯤,

번역가에게는 번역한 책의 출간이 하염없이 미뤄지는 것만큼 속 타는 일도 없다. 번역해서 넘긴 책이 늘 생각만큼 빨리 세상의 빛을 보는 건 아니다. 작년에 장마를 겨냥해 출간할 예정이라 해서 급하게 번역했던 한 책은  결국 시기를 놓쳐 출간이 무기한 미뤄졌다. 내가 봐도 그건 무리였다. 내가 최종 번역문을 넘긴 게 7월 중순이었으니 말이다. 올여름에는 나오겠지 싶지만 출판사에서 올여름에는 비가 너무 안 와서 아무래도 안 되겠다 판단해 내년 여름으로 미룬다 해도 전혀 놀랍지 않을 거다.


현재 내가 번역해서 넘겼지만 출간이 되지 않고 있는 책은 우산 이야기를 포함해 전부 다섯 권이다. 그들이 각기 어떠한 단계에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세 권은 확실히 편집 중이지만 나머지 두 권은 왠지 편집자의 폴더 안에서 고이 잠자고 있을 것만 같다. 에이전시와 계약한 책들이 주로 출간이 하염없이 미뤄지는데 길게는 3년 후에 출간된 경우도 있다. 그러니 번역해서 넘긴 책은 한 동안 잊고 있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 안 그럼 생각날 때마다 (알람 설정을 해 놓은 걸 알면서도 굳이)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수시로 내 이름을 쳐보는 부작용에 시달린다.  


하지만 번역가는 번역료를 받으면 끝이라고 입을 싹 씻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책이 출간되어 나오는 걸 봐야, 인터넷 서점에 댓글이 몇 개라도 올라오는 걸 봐야  마음이 놓인다. 댓글을 일일이 확인하는 건 아니지만 댓글이 아예 안 달리면 그게 또 은근 섭섭하다. 댓글은 대체로 스크롤을 해 가며 대충 살피는 편인데 번역에 대한 언급이 없으면 일단 안도한다. 번역이 정말 잘 되었다는 소리는 기대도 안 한다.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건 그럭저럭 잘 읽혔다는 뜻이므로 알아서 칭찬으로 받아들이며 인터넷 창을 닫는다. 오역 지적이나 번역투 논란이 회자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단히 유명한 작가의 책이나 문학 작품이 아니고는 독자들이 번역을 언급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번역해서 넘긴 책이 너무 빨리 출간이 되어도 문제다. 이게 뭔 소린가 싶겠지만 사실이다. 한 번은 뭐가 그리 급했는지 내가 번역해서 넘긴 지 한 달 반 만에 책이 나온 적도 있다. 사이트에 들어가서 미리보기로 확인해 보았더니 내가 번역한 문장이 그대로 올라가 있었다. 내가 번역을 잘했구나 하는 안도감이 아니라 노파심이 먼저 일었다. 날 것의 번역문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것을 보니 벌거벗은 부위가 들킨 것만 같이 살짝 민망했다. 조금 다듬어주면 안 되나. 어쩐지 빨리 나왔다 싶더라니.


반면 손을 너무 봐도 번역가인 나는 당황한다. 처음 거래하는 에이전시를 통해 자기 계발서를 번역한 적이 있는데 한 동안 소식이 없다가 어느 날 뿅 하고 출간 알람에 뜬 그 책은 교양 심리학 서적으로 둔갑해 있었다. 아무리 시간이 흘렀기로서니 내가 번역한 걸 기억 못 할까 했는데 아무리 기억 저편을 더듬어 봐도 내가 절대로 한 적 없는 번역이었다. 결국 나는 파일을 열어 비교에 나섰고 역시나 그런 문장들은 내 번역문에 없었다. 나는 그 역서를 성형 미인이라 부른다. 평범했던 그 책은 문장 이곳저곳이 뜯기고 새로운 문장이 덧붙여져 아름답게 재탄생했다. 소위 요새 사람들에게 먹히는 책으로. 아직도 그 책을 보면 누구세요?라고 묻고 싶다.


번역한 책이 빨리 출간이 안 되고 있으면 나의 경우 자신감이 떨어진다. 나의 번역문이 너무 엉망진창이어서 손보는 데 오래 걸리는 건가 하는 마음이 앞서는 것이다. 당시에 애썼던 기억은 떠오르지 않고 부족했을 거라 예상되는 부분만 확대되어 다가온다. 나는 늘 부족하다. 겸손이 아니라 새로운 번역을 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책을 읽을 때 글을 쓸 때 번역을 할 때면 늘 나의 부족함을 느낀다. 그런데 변태 같지만 나는 이런 부족한 나를 느끼는 게 좋다. 내가 이 직업에서 좋아하는 부분은 바로 부족함을 느끼는 순간이다. 나는 느릿느릿 조금씩 나은 번역가가 되어 가는 과정을 즐긴다. 그 속도는 화석이 굳는 것처럼 더디기만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느끼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터득하고 그걸 내 것처럼 쓰는 데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멀리 볼 필요도 없다. 지근거리에 살아 숨 쉬는 증거가 있다. 둘째 아이가 바로 그 증거인데 제 누나보다 영어를 편하게 쓰는 아이는 요새 영어와 한국어가 뒤섞여 교포 총각처럼 말한다. 문장 구조는 영어로 그 안의 단어는 한국어로 쓰는 거다. 요새 아이가 자주 쓰는 구문은 I love + OO 구조이다. 이를 테면 “I love 엄마”, “I love 바나나” 하는 식이다. 이 OO 속에는 부사도 허락된다. “I love 같이”, “I love 밖에”처럼. 그런데 아이는 이 문장을 몇 개월 동안 무한 반복한다. 하루에도 질릴 만큼 많이 쓴다. 그래야 아이의 언어가 되는 것임을 새삼 느낀다. 


나도 욕심내지 않으려 한다. 번역할 때마다 또 번역문을 넘길 때마다 나의 부족함에 아쉬워하겠지만 아쉬운 마음을 디딤돌 삼아 또 다른 번역에 충실히 임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제는 나를 믿기로 했다. 번역했을 때의 내가 최선을 다했으리라는 믿음이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특히 번역은 내가 나를 믿지 못하면 지속할 수 없는 직업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터득하고 그걸 내 것처럼 쓰는 데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멀리 볼 필요도 없다. 지근거리에 살아 숨 쉬는 증거가 있다. 둘째 아이가 바로 그 증거인데 제 누나보다 영어를 편하게 쓰는 아이는 요새 영어와 한국어가 뒤섞여 교포 총각처럼 말한다. 문장 구조는 영어로 그 안의 단어는 한국어로 쓰는 거다. 요새 아이가 자주 쓰는 구문은 I love + OO 구조이다. 이를 테면 “I love 엄마”, “I love 바나나” 하는 식이다. 이 OO 속에는 부사도 허락된다. “I love 같이”, “I love 밖에”처럼. 그런데 아이는 이 문장을 몇 개월 동안 무한 반복한다. 하루에도 질릴 만큼 많이 쓴다. 그래야 아이의 언어가 되는 것임을 새삼 느낀다. 


나도 욕심내지 않으려 한다. 번역할 때마다 또 번역문을 넘길 때마다 나의 부족함에 아쉬워하겠지만 아쉬운 마음을 디딤돌 삼아 또 다른 번역에 충실히 임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제는 나를 믿기로 했다. 번역했을 때의 내가 최선을 다했으리라는 믿음이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특히 번역은 내가 나를 믿지 못하면 지속할 수 없는 직업이다. 


1년에 작업하는 책이 예닐곱 권 되는 것 같다. 분량이 적은 책일 경우 더 많아지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 정도 수준을 유지한다. 하지만 출간이 되는 책은 많아봤자 5권이 안 된다. 책은 늘 예정보다 조금 늦게 나온다. 여름에 나온다 하면 가을로 미뤄지고 세 번의 계절을 지나 다음 여름에 나오기도 한다. 괜찮다. 언젠가는 나올 거다. 번역료는 받았으니까 괜찮다. 아니다. 거짓말이다. 자기 전에 인터넷 서점에 또 들어가 볼 테다. 내일은 출판사에 메일도 보내볼 거다.


덧으로 어제 나온 따끈따끈한 역서 소개합니다. 이벤트도 진행하고 있는 것 같으니 살짝 둘러보이소.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7224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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