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고기자리 Jun 30. 2021

성긴 취향(feat. 줌파 라히리)

최근에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을 말하라면 윤이나의 <지금 물 올리러 갑니다>라고 말하겠다. 이 책은 라면을 즐겨 먹는 윤이나 작가가 쓴 에세이인데 특히 모기채로 여치를 지지는 부분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최근 들어 읽은 묘사 중 가장 실감 난다. 라면이라는 주제 안에 삶의 희극과 비극을 녹여낸 글 솜씨는 또 어떠하고. 그녀의 유머는 그 후로도 문장 곳곳에서 나를 간질이듯 발작적으로 웃겨주는데 글 잘 쓰는 사람이 그렇듯 웃기는 데서 끝나지 않고 가끔은 나를 울리기도 한다.


여름휴가에 가져가고 싶은 한 권의 책을 고르라면 주저앉고 이 책을 가방에 넣겠다. 얇아서 한 손에 들고 읽기도 누워서 읽기도 좋다. 그녀는 이 책을 통해 라면을 끓일 때에는 “생각보다 물은 조금 넣고 불은 빨리 꺼야 한다”는 명확하고도 따끔한 지침과 정확한 물의 양까지 가르쳐주었으니 내가 끓인 라면 맛은 이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지면을 빌려 작가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한다.  


인스타그램을 거의 책 리뷰로 채우다 보니 가끔 책 추천해주세요 같은 댓글을 받는다. 나는 함부로 책 추천이란 걸 할 만한 위치에 있지는 않은 터라 그냥 내가 좋게 읽은 것들을 말해준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다. 내가 읽는 책들이 엄청 심오하고 철학적인 류의 책은 아니다. 간혹 그런 것들도 있으나 그런 책을 읽을 때면 섣불리 인스타그램에 올리지 못한다.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한 책들을 공유해 허영을 내보이고 싶지는 않다. 그런 나이기에 엄청 심오하고 철학적인 책의 번역이 나에게 들어오는 일도 없을 것이다. 어찌 보면 다행이다. 나에게는 그런 능력은 없으니 말이다.


이것저것 장르를 가리지 않고 번역하다 보니 마치 주력 품목 없는 동네 구멍가게처럼 되어 버린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생계형 번역가 입장에서 전문 분야는 쌓고 싶다고 쌓아지는 게 아니다. 들어오는 책을 마다하지 않고 번역하다 보면 내가 가장 원하지 않는 장르가 역서 중 가장 많아지는 아이러니한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나도 우아하게 내가 하고 싶은 책만 하고 싶지만 아직까지는 그럴 만한 위치에 오르지 못했다.


들어오는 대로 번역하는 잡식형 번역가이지만 나에게도 취향은 있다. 내 책장에서 가장 좋은 위치에는 마음산책에서 나온 줌파 라히리의 책이 전부 꽂혀 있다. 표지를 장식하는 에이미 베넷의 그림과 그녀의 소설과 썩 잘 어울려 공간이 허락한다면 책등이 아니라 정면을 전시해 놓고 싶은 책들이다. 덕후까지는 아니겠지만 나는 줌파 라히리의 작품을 좋아한다. 물론 줌파 라히리는 작가들의 작가라 불릴 정도로 이미 많은 작가들이 인생 작가로 손꼽고 있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나의 경우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은 이민자 문학이라 불릴 정도로(그녀는 당연히 이러한 수식어를 거부한다) 그녀의 정체성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대부분이라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크게 와닿지 않았다.


그런 작가가 있는 것조차 몰랐던 무지한 나는 통번역 대학원 시절 정영목 교수님 수업에서 그녀의 첫 작품 <축복받은 집>을 만나게 된다. 이민자의 삶에 공감하기는 어려웠지만 단순히 이민자의 삶으로 일축하기에는 내 안의 뭔가를 건드리는 지점이 있었다. 담백하고 세련된 문체에 사람을 잡아끄는 오묘한 분위기. 그런 기억만 내 안에 남긴 그녀는 바쁜 통번역 대학원 생활 속에 잊혀갔고 그로부터 몇 년 후 나는 미국으로 건너왔다.


벵골 출신의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줌파 라히리는 퓰리처상을 비롯한 온갖 상을 휩쓴 위대한 작가이지만 어쩐지 나에게는 친근한 동네 작가로 다가온다. ‘미국인’이 아닌 ‘미국에 사는 사람’으로서의 나를 그녀의 작품 속 등장인물에 곧잘 겹쳐 보는데 그때마다 그녀의 주인공들은 공감에서 한 발 더 나아간 감정을 나에게 훅 던지고 홀연히 사라진다.


진심으로 고백하건대 나는 그녀가 계속해서 그런 배경으로 책을 써줘도 꾸준히 그녀의 책을 사랑했을 것이다. 그건 이민자 문학이 아니라 그냥 문학이었으므로. 그녀는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생의 이면을 때로는 촘촘하게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그려 보였으므로. 그녀의 외도는 처음에는 나를 당황하게 했다. 그녀의 작품을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이탈리아로 떠난 그녀를 살짝 원망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성장을 바라는 독자라면 그래서는  되었기에 이탈리아어로  그녀의 작품을 읽으며 그녀의 새로운 도전을 묵묵히 응원했다. 그녀가  이탈리아로 갔는지 이윽고 배경을 알게  나는 그녀를 이해할  있었다. 그건 충동적인 행동이 아니라 꽤나 계획적인 일이었다. 1999 피렌체를 방문하며 그곳에서 들려오는 소음과 문장, 말들에  인상을 받은 그녀는 미국으로 돌아와 꾀나 성실히 이탈리아어를 공부했다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2012년 가족들과 함께 이탈리아 땅에 발을 디디게 되는데 현실은 가혹했다. 그녀가 처음으로 이탈리아어로 낸 산문집,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에는 처음 이탈리아에 발을 디딘 후 그녀가 느낀 당혹감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 후로도 그녀는 이탈리아어로 한 권의 산문을 더 발표하고 소설을 출간하기까지 한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라는 나의 질문에 그녀는 “창작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안정감만큼 위험한 것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기존 두 권의 산문 번역을 <나폴리 4부작>을 번역한 앤 골드스타인에게 맡긴 것과는 달리 최근에 영어로 번역된 그녀의 책 <내가 있는 곳>은 그녀가 직접 번역을 맡았다. 처음에는 전문 번역가에게 맡겼으나 초고를 보더니 자기가 할 수 있겠다 싶었다고 하는데 그 번역가 입장에서는 뭐지, 했을 것도 같다. 처음부터 영어로 쓴 것과 이탈리아어로 쓴 걸 번역하는 건 얼마나 다른 경험일지는 직접 해 보기 전에는 절대로 알 수 없을 것만 같다. 번역을 하면서 아예 다시 고쳐 쓰고 싶은 충동은 어떻게 억눌렀을지. 그녀의 작품을 영어로도 이탈리아어로도 읽은 이탈리아의 한 영문학 교수는 마치 전혀 다른 두 독자가 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줌파 라히리를 한국에 소개한 건 2003년 브루클린에 머물고 있던 박상미 작가였다. 그녀는 실제로 줌파 라히리를 만나보았다고 하는데 그 모습이 가히 차분했다 한다. 제2의 줌파 라히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이곳에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작가의 책을 소개해보고 싶다. 물론 나보다 발 빠른 사람들이 많아서 내가 이 작가 괜찮네 생각하고 한가하게 읽고 있으면 벌써 한국어로 출간된다는 소식이 들리곤 한다. 뉴욕에 살아도 맨날 헛물이다.


얼마 전 아는 동생에게 줌파 라히리의 <이름 없는 사랑>을 빌려줬는데 드디어 다 읽었다며 펑펑 울었다는 후기를 전해왔다. 동생은 나와 독서 토론 비슷한 걸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으나 너무 오래전에 읽은 나는 울었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해 동생을 실망시켰고 원서로 읽어서 그럴 거라는 애매한 변명을 해 동생을 또다시 실망시켰다. 아, 역시 성긴 취향인가.


취향을 억지로 설계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번역한 책들의 목록처럼 내가 취하는 책들도 잡식에 가까울지 모르지만 경계를 너무 반듯하게 친 상태에서 번역하거나 책을 읽고 싶지는 않다. 취향이나 문체는 시간이 쌓이면서 자국이 남는 것일 뿐이다. 성긴 취향을 조금 촘촘하게 엮어나가려는 노력은 해보겠지만 나 같이 흐리멍덩한 사람에게는 지금의 성긴 취향이 썩 잘 어울릴지 모른다. 나의 취향은 앞으로 더욱 성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니 새로운 책 추천은 언제든 환영이다. 새로운 분야의 번역도 두 팔 벌려 웰컴입니다.


https://taling.me/Talent/Detail/3500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