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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Jul 12. 2021

번역가의 책 읽기

번역가의  읽기는 다양하다. 먼저 번역 의뢰가 들어오면 비슷한 책을 찾아 읽는다. 워밍업 작업이다. 가령 우주비행사 관련 책이 들어오면 <우주를 꿈꾼 여성들>이나 <달로 가는 > 같은 책을 찾아 읽는 식이다. 지금 번역하고 있는  이야기다.   전에는 원주민 작가들의 소설을 번역할 기회를 얻게 되면서 원주민 문학가인 루이스 어드리크의 책을    읽어나갔다. 우주비행이든 원주민 문학이든 몰랐던 세계가 하나씩 열리는 순간은 짜릿하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뒤늦게 타오른 학구열은 빳빳해진 승모근을 부여잡고 기어코 책을 읽게 만든다.


그다음에는 당연히 내가 번역할 책도 읽는다. 번역의 창조성이란 건 읽기에 있다는 정영목 교수님의 말을 되새김질하며 어떻게 창조적으로 읽을 수 있을지 머리를 싸매지만 늘 거기서 거기다. 똑같은 문장을 읽고도 번역가마다 각자 다른 번역을 내놓는 걸 보며 분명 내가 책을 읽는 과정 어딘가에 창의성이 떠다니고 있을 거라 애써 생각해보지만 안타깝게도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창의성은 모르겠지만 다르게 읽기는 종종 내 안에서도 벌어진다. 나는 의뢰가 들어온 책을 한 번 쭉 읽고 번역하기 전 날 다음 날 번역할 부분을 또 읽어두는데 그렇게 읽다 보면 분명 같은 문장이 다르게 읽힌다. 처음에는 설렁설렁 두 번째는 꼼꼼히 읽어서 그런 거겠지만 그게 아니라고, 그때야말로 내 안에서 어떠한 창의력이 발휘되는 순간이라고 믿고 싶다. 번역을 하다가 막히는 경험은 번역가라면 누구든 해봤을 것이다. 뜻을 이해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어떻게 한국어로 풀어야 할지 모르겠어서일 수도 있지만 여러 번 톱아 보고 또 시간을 두고 바라보다 보면 어느 순간 풀릴 때가 있는 걸 봐서 창의성에도 어느 정도의 성실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가장 많이 읽는 책은 번역과는 관계없는 책이다. 내가 좋아서 읽을 뿐이다. 하지만 아이가 “엄마, 왜 일 안 하고 책 봐.”라고 물을 때 “이것도 일 하는 거야.”라고 답하는 순간 독서는 일이 된다. 번역과 관련 없는 책을 읽는다고 하지만 활자로 가득한 책과 번역의 관계를 무 자르듯 자를 수는 없으므로 대체로 나는 책을 읽을 때에도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자신이 정말로 즐겨하고 좋아하는 일이 취미라면 독서는 나의 취미다. 글 읽는 인구가 줄면서 정말로 독서를 취미로 생각하는 이들만이 책을 읽는 세상이 도래한 것이 나는 조금 좋다. 중학교 때나 고등학교 때 취미란에 독서를 적으면서도 약간의 멋쩍음을 느꼈다면 이제는 당당하게 내 취미를 밝힐 수 있다. 독서는 아이들을 옆에 끼고도 할 수 있는 유일한 취미이자 가장 저렴한 취미다.


주위의 프리랜서들은 뜨개를 하거나 빵을 굽는 등 책이나 글과는 먼 취미를 하나씩은 갖고 있다. 취미란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나에게도 없는 건 아니다. 가끔은 이렇게 재미있는 게 많은 세상에 책이라는 취미밖에 없는 내가 가엽고 조금은 지루한 인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책을 좋아하는 건 그보다 재미있는 취미를 아직 못 찾았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다양한 맛이 있어서 골라먹는 재미가 쏠쏠하기까지 하다.  


미국에 와서 맹렬히 책장을 채우던 때가 있었다. 책을 주문할 때면 배송비가 책값만큼 들었지만 많게는 한 달에 네다섯 번이나 장바구니를 털었다. 아이들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를 그 속에 털어 넣는다는 상징적인 퍼포먼스에 가까웠으나 미국에 온 뒤 그리움이 내 안에 거리를 만든 탓도 있었다. 외국에 오래 살다 보면 해당 국가의 언어를 어느 정도 내려놓게 되는 시점이 오는데 한국어를 향한 집착은 그 시점과 맞물려 가파른 상승 곡선을 보였다.


어릴 때의 나는 책을 좋아했다. 중학교 때 일요일이면 아빠랑 동네 책 대여점에 가서 비디오테이프와 책을 빌려오곤 했는데 《퇴마록》이나 《태백산맥》 같이 10권이 넘는 책들은 가족 모두 돌려가며 읽었다. 《다락방의 꽃들》, 《세상의 모든 딸들》 같은 책은 내가 직접 골라 읽었는데 거기에 야한 얘기가 나오면 아빠가 내가 이 책을 읽는 것을 아나, 하며 괜히 뜨끔해하기도 했다(근데 생각해 보면 야한 내용은 《태백산맥》에도 많이 나온다).


20대의 나는 연애하느라 또 노느라 책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내어주지 못했다. 읽더라도 지금과는 전혀 다른 류의 책들,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나의 삶에 맞는 책들만 골라 읽고 빠르게 소화시키는 데 급급했다. 한 동안 책에서 손을 놓기도 했고. 하지만 무언가를 좋아하기 위해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니다. 예전의 내가 그냥 책을 좋아하는 한 명의 독자였다면 지금의 나는 서점에 가는 걸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불과 5년 사이에 닥친 변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온라인 서점에 들어간다. 새로 나온 책이 없나 살피고 책 속에서 만난 또 다른 책을 장바구니에 담고 인스타 친구들이 알려주는 숨어 있던 책도 담고 그렇게 꼬리에 꼬리는 무는 책 쇼핑이 끝나갈 무렵이면 장바구니는 꽉 차 있고 주기적으로 비워주지 않으면 옆구리가 터져버릴 지경이다. 장바구니 담기라는 말을 누가 처음 사용했는지 궁금하다. 장바구니 담기라는 말을 보면 나는 진짜 장바구니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장바구니란 비워야 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삭제 혹은 결제 버튼을 눌러야 하는데 삭제해 버리면 그 책을 영영 못 만날 것 같은 기분이기에 대체로 결제 버튼을 누르게 된다.


다행히 나에게는 책 구매를 합리화해줄 만한 명실상부한 직업이 있다. 그리고 나에게는 마감이 끝났으니 책을 구매하라고 부추기는 친구가 있고 뉴욕에서 당근 마켓을 열라고 부추기는 동생이 있다. 이들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온갖 핑계를 대며 한국 서점에서 책을 퍼 나르고 있다.


책을 읽을 때면 좋아하는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는 기분이다. 그걸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한 번 읽으면서 뭉근하게 좋은 기분을 느끼고 두 번, 세 번 읽으면서 내가 그 책을 좋아하는 이유를 찾아가는 여정을. 좋아하는 책의 우선순위가 새 책을 읽을 때마다 바뀌는 금사빠인 나는 아직도 읽을 책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좋다. 책을 기다릴 때의 설렘은 또 어쩌고. 책에 대해서라면 밤새도록 얘기할 수 있다. 이제 정말 하고 싶었던 말로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나의 취미는 독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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