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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Apr 20. 2020

B급 중에 최고

내가 바라는 지향점

다른 번역가의 글을 보다가 흠칫했다.


대한민국의 출판 번역가는 쉽게 대체될 수 없는 A급 번역가와 쉽게 대체될 수 있는 B급 번역가로 나뉜다는 적나라한 현실.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나는 B급이겠지. 과연 내가 A급 번역가가 되는 날이 올까?




나처럼 번역 하나만 하기에도 급급한 이들이 있는 반면, 이 세상에는 다른 일도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글을 쓰고 번역을 하는 이들이 있다.


리베카 솔닛의 책을 번역하는 김현우 PD,

줌파 라히리의 책도, 제임스 셜터의 책도 번역하는 박상미가 그렇다.

박상미의 경우 심리학과를 졸업해 뉴욕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번역도 하고 글도 쓰고... 잠깐 뭐지? 천재인가?


부러우면 지는 건데 나는 계속 처참하게 지고 있는 중이다.


부러운 마음을 한 가득 안고서 계속 공부를 한다.


좋아하는 소설책을 원서와 비교해 놓고 보고, 한국어로 쓰인 책도 읽는다. 의무감은 아니다. 그저 좋아서 읽는 거다. 이렇게 공부만 해도 돈이 나오면 참 좋겠다.


한 겨울에 잎을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내보인다 해서 그 나무가 죽은 건 아니듯

나에게도 언젠가 흐드러지게 꽃 피우는 봄날이 찾아오겠지.


그러다가 문득 든 생각,


용의 꼬리가 되느니 뱀의 머리가 되는 게 낫지 않을까. 불가능한 A급을 우러러보다 목뼈에 금 가기보다는 B급 번역가 중에서 최고가 되어보는 게 어떨까.


어쩜 최고의 B급 번역가조차 나에겐 불가능한 일일지 모르지만.


그럼 대체 불가능한 B급 번역가 정도는 어떨지. A급은 아니지만 그만의 특색이 있어서, 어떤 책을 보면 그 사람이 역자로 딱이겠다 싶은... 가만, 그건 A급 번역가잖아.


어쩌다 잡식형 번역가가 되기는 했지만 사실 나는 하고 싶은 분야가 비교적 확고하다. 그런데 막상 그쪽 분야로 가기 위한 준비 작업에는 소홀했다. 그동안 돈을 벌기 위해, 혹은 자리를 잡기 위해 떨어지는 일감을 넙죽넙죽 받아 든 결과라 할 말은 없지만, 그 와중에 애 둘을 낳아 키우느라 자기 계발에 소홀했다는 변명 아닌 변명도 해보지만, 결국 내 손에 쥐어진 성적표는 내가 밟아온 길이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일 테다.


어쩜 나는 문보영 시인이 말한 “준최선의 롱런”을 실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해 번아웃되지 않고 최선 직전에서 어슬렁거리며 간 보기. 준최선으로 비벼 보기.”




“인생이란 당신이 뭔가를 계획하고 있을 때 생겨나는 또 다른 사건이다.”

                                                                                                    《긴 여행의 도중》, 호시노 미치오


번역료를 물어본 뒤 내가 원하는 번역료를 말해주자 답장조차 하지 않는 그런 출판사 말고 나를 귀하게 모셔갈 줄 아는 출판사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일하고 싶다. B급의 끝자락일지언정 나와 합이 맞는 일을 꾸준히 받는 미래를 꿈꿔 본다. 나 스스로 귀해져야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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