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가장 중요한 돈 얘기를 할 것이니 귀를 쫑긋 세우기 바란다. 내 몸값을 공개할 생각은 없지만 생각보다 높다는 것만 알아주기를(이건 내 기준이 아니라 출판사 기준이다. 출판사는 늘 번역료가 비싸다고 생각하니까). 출판계는 큰돈이 움직이는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번역료로 떼돈을 벌 거라는 기대는 안 하는 게 좋다. 이미 다 아는 사실일 테니 스킵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출판사와 첫 거래를 할 때 나는 매당 2,500원을 받았다. 아무도 내가 얼마를 받아야 하는지 가르쳐주지 않았고 나 또한 주위에 물어본 적이 없었기에 나에게는 그게 적정한 번역료인지 판단할 눈이 없었다. 그저 상대가 제안하는 번역료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다. 그전까지 에이전시와의 거래가 전부였던 나는 에이전시에서 얼마를 가져가는지 몰랐으므로 출판사와 거래할 때 나의 몸값이 얼마인지 감조차 없었다. 훗날 거래하게 된 에이전시에서 수수료를 투명하게 공개한 것과는 달리 그 에이전시와의 거래에서는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훗날 나는 초보 번역가에게 대체로 3,500원이라는 번역료를 지급한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되는데, 다행히 모든 초보 번역가가 그런 황금길을 밟는 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지금은 유명한 H번역가도 처음에는 2,500원으로 시작했다는 얘기를 듣고 나의 형편없었을 실력에도 2,500원을 준 출판사 사장님께 감사하는 마음까지 들었다(하지만 여기에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숨어 있었으니 에이전시와 처음 거래할 때에는 이 가격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번역료를 받고 일했으며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일했다는 거다).
5년 후쯤에는 시장의 섭리에 따라, 또 그래도 될 것 같아 3,000원으로 슬그머니 올렸다. 시장에서 받아들여진 걸 보아 적당한 몸값이었나 보다. 새로운 출판사와 거래할 때에는 시작가가 상당히 중요하다. 훗날 거래가 계속 이어진다 하더라도 섣불리 번역료를 올려달라고 요청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적정 번역료에서 너무 깍지 않을 것을 권한다.
지금쯤 그냥 내 마음대로 올리면 안 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래도 괜찮다. 내 몸값은 내가 정하는 것이므로. 하지만 시장에서 받아주는지 문제다. 출판사에서 내 몸값보다 낮은 번역료를 제안했는데도 수많은 지원자가 몰리면 우리는 기세 등등하게 올렸던 번역료를 멋쩍게 다시 낮춰야 할지도 모른다. 결국 수요와 공급의 문제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거스르려면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면 된다.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특장점을 길러 그거 하면 나라는 번역가가 떠오르게 만드는 거다. 하지만 그게 말이 쉽지 현실에서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업계에서 나라는 번역가가 있는지조차 잘 모르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래도 몸값을 높이려면 실력을 키우는 방법밖에 없다. 물론 5년이 또 지나서 500원 올리지 뭐, 이렇게 안이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500원 올리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시간이 아니라 실력을 쌓아야 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나의 몸값보다 낮은 번역료를 제시하려거나 내가 부른 번역료보다 낮게 제시하는 곳이라면 번역의 질을 중시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번역을 소중히 여기는 출판사와 일하고 싶은 건 모든 번역가의 공통된 마음 아닐까. 물론 가끔 내가 이렇게 불렀는데 저 쪽에서 곧바로 수긍할 경우 더 높게 부를 걸 후회하기도 하지만. 눈치싸움을 끝이 없다.
나 같은 번역가는 세고 셌을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우선 마감부터 잘 지키자. 나는 애초에 마감을 넉넉히 잡고 일하는 편인데 그래서 예정 마감일보다 일찍 끝날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면 대충 한 느낌을 줄까 봐 일부러 마감 때까지 기다렸다가 임박했을 때 주기도 한다. 다른 번역가들도 그럴까 가끔 궁금하다.
나만의 스타일을 만들면 번역료가 오를까. 백두리 작가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으려면 많이 그려보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시작할 때에는 누구에게나 내가 없다고. 번역도 그렇다. 처음 몇 권 번역할 때는 원문을 옮기는 것만으로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내가 번역한 내용을 한 권의 책으로 바라볼 눈도 없는 마당에 문체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하지만 역서가 쌓이고 문장을 매만지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내 문체란 게 쌓인다. 그리고 그걸 알아봐 주는 사람들도 생긴다. 물론 번역가는 내 문체를 내세우기보다는 작가의 문체를 드러내야 하는 사람이지만 번역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책 가운데에는 번역가와의 결이 중요한 책도 있다. 분명 어느 시점에는 나라는 사람의 글을 보고 그 글에 맞는 책을 들고 나를 찾아오는 클라이언트가 생긴다.
그러니 적극적으로 나의 몸값을 올리도록 하자. 낮은 번역료를 제시하는 출판사의 제안에 닥터 피시처럼 몰려드는 건 그들만 배 불리는 일이다. 출판사는 절대로 먼저 번역료를 올려주지 않는다. 물론 예외도 있다. 우리의 젠틀한 사장님처럼. 하지만 그런 경우는 정말 드물기 때문에 내가 먼저 나서야 한다.
참고로 몸값을 올리기 가장 적정한 시기는 새로운 출판사와 계약할 때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한 번 계약한 출판사와의 거래에서 갑자기 번역료를 올리기가 쉽지 않으므로 새로운 출판사와 계약할 때 처음부터 자신의 몸값을 당당하게 주장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몸값에 정당한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샘플 번역에는 공을 들이자. 상대가 믿을 만한 번역가임을 실력으로 보여주자.
이건 조금 다른 얘기지만 번역료를 계약할 때 보통 매절로 받지만 반인세로 계약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에 딱 한 번 그렇게 계약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솔깃했고 어쩜 매절로 받는 것보다 더 괜찮은 제안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결과적으로 책의 판매량은 그저 그랬고 대충 매절로 계약한 비용과 비슷하게 번역료를 받기는 했으나 할부로 찔끔찔끔 받다 보니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이 들어 그 후로 반인세 계약 방법은 피하고 있다. 그 책은 결국 절판이 되었다.
나는 내가 번역한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도 좋고 출판사에서 번역 잘했다는 칭찬을 받는 것도 좋아한다. 하지만 번역가로서 나에게 일어날 가장 좋은 일은 누가 뭐래도 번역료가 오르는 일이다. 번역하다가 달달한 디저트라 생각날 때 돈 생각 없이 마음껏 집어 들 수 있으면 좋겠고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 통장 잔고를 생각하지 않고 비행기 표를 예매할 수 있으면 좋겠다. 전자는 잘 모르겠지만 후자는 진짜 부자만 할 수 있는 일 같다. 아무래도 번역가가 꾸기에는 너무 높은 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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