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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Dec 08. 2022

번역하려다 사기당할 뻔한 날

천정부지로 치솟는 환율을 바라보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달러를 벌어야 했다. 예전에 가입만 해놓고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던 proz.com(프리랜서 번역가 사이트)에 본격적으로 유료 회원으로 가입하고 매일 사이트를 들락거린 건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거의 출판 번역만 해온 내가 이곳에서 갑자기 일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곳은 다른 세계였다. 기술번역 위주이다 보니 Trados 같은 번역 프로그램을 사용할 줄 알고 구입도 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무 재미가 없었다. 약 이름과 화학 실험 순서를 번역하는 일을 과연 매일 할 수 있을까... 방황하고 있던 어느 날, 정신 번쩍 들게 만드는 일이 일어났다.  


이 사이트에 사기꾼이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 번역 의뢰로 사기를 당할 수 있다니, 신선하고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나는 사기당할 뻔하는 순간에 그쳤지만 누군가는 정말로 당할 수도 있으니 그 과정을 간략히 공개하고자 한다.



1. 사기꾼이 번역을 의뢰하는 메일을 보낸다. 파일과 함께.


2. 선금으로 50퍼센트를 보내주겠다고 한다(수표로)

    여기에서부터 이상한데 개인 수표가 아니라 cashier's check로 보내준다고 하면 일단 의심해야 한다. 개인 간의 거래는 개인 수표로 하면 그만이므로 굳이 cashier's check로 보낼 필요가 없다.


3. 수표를 fedex로 보내준다. 이 수표에는 의뢰인이 언급했던 금액보다 더 큰 금액이 적혀 있다.  


4. 수표가 도착하면 그때부터 말이 길어진다.

   자기 회계사가 잘못된 금액을 보냈으니(나의 경우 아들 휠체어 비용이 거기에 포함된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차액만큼 자신에게 보내달라고 한다. 수표가 입금되면 은행계좌에 들어가는 데 하루 이틀 시간이 걸리는데 그 시간 차를 이용해 차액(대략 800달러)을 챙기려는 속셈인 듯하다.


나의 경우 내가 그건 안 된다고 한 번 받은 수표를 돌려줄 수는 없다고 강경하게 나갔더니 그럼 그 금액을 전체 금액으로 치면 어떠냐는 제안이 왔다. 마치 진짜 번역을 의뢰하고는 내고를 하려는 것처럼 느껴지기에 사기가 아닌가, 잠시 안심했으나 자꾸 은행에 갈 때 말하라고 하고 빨리 은행에 가라고 재촉하는 모양새가 이상해서 구글에 'check frauds'를 쳐보았다.


검색 결과 수표가 진짜인지 알아보려면 해당 은행에 전화해서 확인하는 편이 가장 좋다 했다. 곧바로 전화를 걸어 확인했더니 담당자가 무효한 수표라고 했다. 이때에는 수표에 적힌 번호가 아니라 수표에 찍혀 있는 은행을 구글에서 직접 검색해 사이트에 적힌 번호로 전화해야 한다. 수표 자체가 가짜이기에 거기에 적힌 번호로 해봤자 한 통속인 사람들에게 전화하는 꼴.


나는 곧바로 전화를 걸어 사기인 걸 깨달았지만 어리바리하게 굴다가는, 특히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은 사기를 당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게다가 차액을 챙기는 것 말고도 뭔가 다른 방법으로, 그러니까 내가 그 가짜 수표를 일단 내 계좌에 입금하면 그쪽에서 내 계좌에 침투해 뭔가 불량한 짓을 시도할 수도 있는 구조인 듯했다.


이 일을 당하고 한동안 그 사이트에 들어가지 않았다. 일이 급한 이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사람이 너무 괘씸해 영혼이 털린 기분이었다. 알고 보니 이 수법은 전형적인 사기수법으로 페이스북이나 이베이 등 여러 사이트에서 몇 년 전부터 횡행했다고 한다. 번역 의뢰를 하고 가격을 전혀 내고하지 않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꽤 높은 가격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상대가 그렇게 순수히 나오면 일단 의심부터 해봐야 한다.


번역료를 떼어먹는 경우는 봤어도 번역 의뢰를 이용한 사기는 처음 당해봐 그날 하루는 정말 일할 맛이 안 났다. 하지만 결국 일이 급한 건 나였기에 결국 매일 사이트에 들어가 또 다른 번역 건이 올라오지 않았나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또 다른 사기꾼에게 비슷한 메일을 받기도 해, 분노를 담은 메일을 보내기도 했는데 그러다 보면 내가 뭘 하고 있는 건가... 회의가 들기도 하고, 달러 벌기 참 어렵구나 싶기도 해 울적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의뢰를 따서 번역하는 파일은 결국 재미 없는 문서들 뿐이고..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며 깨달은 건 나는 책 번역을 가장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어찌어찌 기술 번역가로 정착해 달러를 마구마구 벌어들이며 재미없는 문서를 번역할지, 돈이 안 되더라도 책 번역을 계속할지 선택하라면 난 아무래도 후자를 선택할 것 같다. 아이들 때문에 마감이 긴 출판 번역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핑계처럼 말해왔지만 사실 그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음을 한 달 동안 방황한 끝에 새삼 깨닫는다. 그렇다면 달러는 다른 방법으로 벌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2023년을 한 달 앞두고 방황의 그늘은 짙어져만 간다. 하지만 프리랜서로 사는 한 안정적인 삶은 없다. 모든 분야의 프리랜서가 그렇듯 자신이 할 수 있는 분야를 조금씩 넓혀가거나 좁혀가면서 나만의 길을 내는 수밖에. 2023년이 된다고 모든 고민이 싹 사라지고 백지에서 시작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렇기에 매일이 고민의 연속이지만 지금껏 쌓아온 것들을 발판 삼아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나 자신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다. 그런 믿음마저 없으면 우리의 마음은 한없이 추락하고 말 테다. 사기꾼이 노리는 건 그런 물렁한 마음, 기댈 곳 없어서 종잇장처럼 얄팍해진 마음일 테니 오늘도 마음 단디 먹고 책상 앞에 앉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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