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니 나라는 번역가가 과연 대체불가능할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경쟁력을 갖추려면 대체불가능한 사람이 되라고들 하잖아요. 하지만 그런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더군다나 더 저렴한 보수를 받으며 일하려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가운데? 문학번역계에서는 특정한 작가의 책은 무조건 특정 역자에게 맡기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조차 언제 바뀔지 알 수 없습니다. 관심 있는 작가의 역자를 꾸준히 살피고 있는데 어느 순간 역자가 바뀌었더군요. 세대교체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체불가능한 역자가 되기를 꿈꾸는 건 이제 저에게 너무 비현실적인 목표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저 사람한테 맡기면 안심할 수 있어’ 정도로 목표를 낮췄습니다. 사실 그것만으로 대단한 목표지만요. 다른 역자로 대체된다면 그 사람의 역량이 나보다 뛰어나거나 보수가 적거나겠지, 생각하면 그만이니 정신 건강에도 좋습니다.
예전에는 남들과 차별화하기 위한 나만의 콘셉트를 만들라는 말에 귀를 쫑긋 세웠는데, 이제는 그게 억지로 만들어지는 걸까 라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내가 꾸준히 그 방향으로 역서를 내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어디 제 입맛에 맞는 책만 들어오나요. 먹고살려면 닥치는 대로 일해야 하는 상황에서 콘셉트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콘텐츠화되는 시대에는 사람조차 브랜드가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니 조금은 서글픕니다.
그런데 콘텐츠에만 집중하다 보면 남이 차린 가게만 기웃거리는 일이 벌어집니다. 나에게 없는 것만 찾게 되죠. 나의 유일한 경쟁자는 과거의 내가 되어야 하는데 말이죠. 게다가 번역가가 경쟁해야 하는 진짜 상대는 다른 번역가가 아니라 인공지능 아닐까요. 기계번역을 초벌로 한 번역이 문학번역상을 받아 난리도 아니었죠. 인공지능의 발달 속도는 평범한 인간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저는 아무리 그래도 출판번역가는 큰 변화를 겪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어요. 하지만 이 정도 속도라면 10년 후에 정말로 번역가라는 직업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 계발서나 경제경영 같은 책은 기계 번역을 초벌로 하고 인간은 수정만 하는 정도로 상황이 바뀌지 않을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상황에 대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계에게 대체불가능한 번역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제는 그런 것들을 생각해보려 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역량의 범위를 조금씩 넓히는 수밖에 없겠지요. 한 가지 우물만 파다가 그 우물에서 더 이상 물이 나오지 않으면 큰일 나잖아요. 그래서 요즘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제 직업을 보려고 노력합니다. 영한출판번역가라는 한 가지 기술에 안주하지 않는 것이지요. 함께 하고 있는 한영번역 작업 역시 인공지능의 위협에서 자유롭지는 않지만 기반이 튼튼하다면 분명 제가 더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테니 기술을 더 갈고닦으면 좋겠지요. 거기에서 더 가지를 뻗어나갈 수 있을 테고요. 인공지능이 발달하더라도 아직까지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합니다. 인간이 수행하는 영역의 분야가 조금씩 바뀌어가는 지금의 트렌드를 바짝 추격하며 나름의 분석을 계속해서 시도한다면 그러한 현실이 닥쳤을 때에도 조금은 덜 불안할 것입니다.
기계에게 대체 불가능한 사람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느 날 재앙이 닥친다고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걸 멈추는 건 아니잖아요. 방향을 잘 설정해 꾸준히 전진하다 보면 그게 나의 브랜드가 되고 콘셉트가 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능력이 안 되면 끌어올리면 될 테고요. 이참에 지난번에 시도했다 실패한 것들에 다시 도전해 봐야겠네요. 그 사이에 저의 역량이 향상되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