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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May 01. 2023

저는 불안합니다

불안하다는 말을 내뱉고 나니 속이 시원하네요. 맞아요, 저는 불안합니다. 늘 불안하죠. 현대인이라면 어느 정도의 불안을 늘 달고 살 거예요. 직장인은 직장인 나름대로, 프리랜서는 프리랜서 나름의 고충이 있겠죠. 제가 왜 불안한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정리를 한 번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내가 불안한 이유

1. 언제까지 일해야 할지, 일을 꾸준히 할 수나 있을지 몰라서

2. 이렇게 노력하면 10년 후 어떠한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는 비전이 불확실해서


1. 언제까지 일해야 할까?

우리는 언제까지 일해야 할까요? 30대에, 40대에 은퇴하는 파이어족이 유행하며 저도 살짝 마음이 흔들린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마흔의 나이에 은퇴자금 하나 마련하지 않은 현실에 마주쳐야 했죠. 좌절도 잠시, 저는 아무리 좋은 의의를 갖다 붙인다 해도 파이어족은 제가 원하는 삶과는 다른 방향이라는 걸 인정해야 했습니다. 저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가늘고 길게 쭉 일을 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세상을 향한 호기심의 끈을 놓고 싶지 않고 계속해서 공부하고 변화하고 싶습니다.


다만 이 사회가 저에게 언제까지 일을 줄지 그게 불안할 뿐인데, 그건 제가 변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겠죠. 수동적으로 주는 일만 받아서는 언젠가 일이 뚝 끊기고 말 것입니다.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부인했던 사실이지요. 능동적으로 일을 찾아 나서는 데에는 품이 드니까요.


현재 저의 삶은 의뢰 들어온 일 맡아 하기, 아이들 돌보기, 집안 살림하기라는 3개의 큰 축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거기에 뭔가 능동적으로 일을 벌이려면 이 3개의 축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삐걱댑니다. 몇 차례 그런 일을 경험하다 보니 뭔가 새로운 일을 시도하기가 저어 됩니다. 저에게는 책을 발굴해 기획서를 쓰는 일 정도가 될 텐데, 그러려면 일단 책을 읽어야 하고 분석을 해야 하고 기획서를 써야 해요. 시간은 많이 소요되는데 결과는 전혀 알 수 없죠. 실패할 확률이 지극히 높고요.


하지만 언제까지 일해야 할지 불안한 저를 달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뭔가를 더 하는 것뿐입니다. 기존에 팔던 물건을 계속 파는 데서 더 나아가 새로운 제품을 기획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때그때 주문받은 물건을 생산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고객의 니즈를  먼저 파악해야 하는 것이지요. 한 마디로 참 피곤한 일입니다. 알면서도 되도록 뒤로 미루고 싶은 일. 솔직히 꾸준한 일감만 보장된다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 하지만 할수록 나에게는 도움이 되는 일. 다만 돈이 되지 않고 가끔은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드는 일. 이 모든 특성이 보글보글 끓으면서 저를 불안하게 합니다.


2. 10년 후 나의 미래에 대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다.

이 정도 경력을 쌓으면 어떠한 미래가  보장된다는 얘기를 들으면 누구나 열심히 노력할 수 있습니다. 결과가 보장된다면 노력에도 힘이 붙죠. 하지만 그 미래가 불투명하면 노력에도 힘이 빠집니다. 지난 10년 동안 제가 주야장천 달려온 건 이 정도 하면 뭔가 큰 그림이 보이거나 이렇다 할 성과가 짠, 하고 나올 거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10년 하고 나서도 그게 흐릿한 지금, 솔직히 조금 힘이 빠집니다. 같은 이유에서 저의 10년 후가 어떨지 전혀 그려지지 않죠.


어떠한 미래도 그려볼 수 있다는 낙관적인 태도로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은 어느 정도의 안정을 찾는 성향이 있지 않나요? 새로움을 추구하는 성향의 반대편에는 안정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기본적인 안정이 보장되지 않으면 새로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도 증발합니다.


제가 불안하다면 번역계의 생태계가 각자도생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제가 외국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한국에서도 체계적인 번역가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습니다. 선배들의 항로를 추적해 봐도 각자 살길을 찾아 나서는 기분이지 후배들을 끌어준다거나 하는 분위기는 없습니다. 체계적이지 않은 데뷔 시스템도 한몫할 거예요. 나름의 생산적인 시도가 있었지만 제가 보기에는 여전히 각자도생 하는 기분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나의 10년 후는 내가 책임지는 수밖에 없는 걸까요? 저 역시 뒤따라오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 위해 책도 써보고 전자책도 발행하고 하지만 단편적인 노력에 그칠 뿐 본격적인 시도는 하고 있지 않으니, 중견 번역가로서 책임을 다 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도 드네요. 개개인이 만나 수다를 떠는 장도 좋지만 보다 생산적인 토론이 이루어지는 장이 마련된다면 번역가 개개인이, 프리랜서 개개인이 지고 있는 불안이 조금은 해소되지 않을까요. 10년 후의 나를 그리는 일은 개인의 몫이겠지만 보다 다양한 사례가 제시된다면, 그것이 조금 더 체계적으로 정리된다면 이 분야의 발전에도, 개인의 불안을 잠재우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저보다 앞서 이 길을 가고 있는 선배들은 어떨까요?


-교수가 되거나 개인 강의를 하거나(사실 같은 길)

-아예 더 나아가 작가가 되거나


이 둘 중 하나로 귀결되는 듯합니다. 둘이 믹스되거나요. 전자가 경제적인 부분을 채워준다면 후자는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쪽에 가깝겠지요. 둘 중 어느 것도 딱히 저의 미래로 그려지지가 않습니다. 후자는 아무래도 벌이가 걱정이고 전자는 해외에서 가능한 길일지 자신이 없네요.


그렇다면 이쯤에서 정말 번역가라는 직업을 내려놓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봐야 할까요. 그것 또한 후배들에게는 어떠한 길로 제시될 수 있을까요. 어떤 날은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고 또 어떤 날은 난 아무래도 안 될 것만 같은, 고민이 깊어져만 가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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