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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May 17. 2023

부러우며 지는 걸까요?

어떤 분야든 그렇겠지만 프리랜서 번역가로 일하다 보면 다른 번역가들을 부러워하는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나는 백날 해도 안 되는 기획서를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매번 통과시키지?

내가 하고 싶은 책은 왜 죄다 저 사람이 번역하지?


질투와는 살짝 다르지만 어쨌든 시기심에서 출발한 감정이지요. 한 때 저는 내가 하는 책들은 죄다 재미없어 보이고 출간이 되어봤자 별로 홍보도 하고 싶지 않은 책뿐이야, 하며 자괴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책들을 번역하는 사람들은 번역을 하면서도 정말 즐겁지 않을까, 나처럼 꾸역꾸역 돈 벌려고 하는 게 아니라, 하는 감정에 갇혀 있었죠. (사실 번역가로서 정말 정말 하고 싶어서 하는 책들은 손에 꼽을 만큼 적습니다. 그냥 돈 벌려고 하는 거죠. 직장인들처럼요)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러지 않습니다. 저 사람이 저 책을 번역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을까, 독자들은 저자의 위상만 보고 그걸 번역하느라 고생했을 역자는 보지 않는데, 노력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금액을 받았을 테지. 그런데 인터넷에 번역 비판까지 받고 있구나, 하는 짠한 감정이 앞섭니다.


그리고 그 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저에게 온 책이 있다면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꾸역꾸역 번역을 합니다. 물론 그냥 감사합니다, 만 하는 건 아니죠. 몸값 협상을 합니다. 어느 선 이하에서는 일을 받지 않습니다. 거절의 기술 중 하나가 정말 높은 금액을 부르는 거라죠. 정말 하기 싫은 일이거나 딱 봐도 어려워 보인다 싶으면 높은 번역료를 제시합니다. 그래도 상대가 좋다고 하면 뭐 그래 많이 받으니까 하면서 하면 되는 거고 거절하면 잘됐다 하면 되는 거죠(거의 대부분 거절합니다)


혹시 번역가 분들이 이 글을 읽고 계시다면 제발 낮은 단가에 일 하지 마세요. 높은 단가를 불렀을 때 출판사에서 거절한다는 건 낮은 단가에 하겠다는 사람이 넘쳐나기 때문이거든요. 우리 스스로의 몸값을 낮추는 일이니까 제발 그렇게 하지 말아 주세요.


예전에 출판사에서 본의 아니게 저에게 (아마 실수로) 포워드 한 메일을 봤는데요, 다른 번역가와 계약한 내용이 상세히 들어 있었어요. 나름 유명한 작가의 역서였는데 저보다 낮은 단가에 진행했더군요. 게다가 그분은 출판사 직원들께 간식까지 돌렸단 걸 그 메일을 통해 알았습니다. 미국에 있는 나와는 경쟁이 안 되겠구나 싶으면서도 번역가가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서 속이 상했습니다. 번역하느라 고생하는 번역가에게 출판사에서 당 떨어질 무렵 간식을 줘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런 아름다운 미래는 제가 번역가로 일하는 동안에는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번역을 멈출 수는 없겠죠. 어쨌든 새로운 책 의뢰가 들어올 때 가장 설렌다는 거, 번역하는 분들이라면 다 아실 테니까요. 물론 그 설렘은 번역이 중반쯤 진행될 무렵에는 조금씩 휘발된다는 것도요.


온라인으로 알게 된 선배 번역가분께서 예전에 그러셨어요. 이제는 기획을 해야 할 때라고. 위로 올라갈수록 주는 것만 받아서는 못하게 된다고. 그때만 해도 당장 발 벗고 기획에 나설 것처럼 마음이 들썩였는데, 당장 눈앞에 산재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미루고 또 미루고만 있습니다. 한국에 소개하고 싶은 책은 넘쳐납니다. 독자로서 읽을 때에는 신이 나지만 그걸 분석해서 기획서를 작성할 생각을 하면 한숨이 나오지만요.


모처럼 큰맘 먹고 기획을 해볼까 하는데 곧 아이들 여름방학이 다가옵니다. 언제쯤 시간부자가 될 수 있을지. 저의 기획안은 아이들이 개강하는 9월로 하염없이 미뤄질 것만 같습니다. 그래도 해야겠지요. 부러운 일이 지는 일이 되지 않으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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