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엄마 이야기
1. 들어가는 말
토종 살리기 단체 가배울에는 회원 서클 댄스 모임이 있다. 그 모임에서 돌아가며 공동체 단상에 대해 발표하는 기회가 있었다. 이 글은 그때 발표를 위해 준비한 글이다. 준비하면서 나의 공동체 지향의 원천수로 어릴 적 한 겨울에 엄마가 방에다 넣어 준 따뜻한 세숫대야의 물이 생각났다. 이 글은 그때 발표한 글이다.
공동체는 관심, 사랑, 우정, 연대, 존중 등의 공유 가치가 살아 작동하는 일련의 관계이다. 공동체성 혹은 그 관계가 일회적인지 임시적인 주기적인지 항구적인 지는 무척 다양하다. 모든 존재가 불성을 가졌기에 또한 모든 존재는 공동체적이다. 치성한 탐진치 삼독심으로 이 불성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절망적인 상황이 도처에 펼쳐 저 있다 하더라도.
2. 기억하는 공동체 첫 경험: 춥지만, 따뜻했던 그해 겨울
나는 58년 생 개띠다. 아버지는 단신 월남하셨고 군대를 제대하고 청계천 노점 고물상으로 정착하셨다. 내가 5~6세부터 여덟 살까지 우리 집은 대로를 사이에 두고 아버지 노점상 맞은편에 위치한 한옥의 방 한 칸이었다. 청계천 쪽 세운상가에서 청계천 3가 쪽으로 200미터쯤 올라가서 있는 대로변 집이었다. 꽤 큰 한옥이었을 그 집은 대로변은 그때 이미 다 가게로 개조된 상태였고 대문은 쪽문같이 작은 문이었다. 그래도 안으로 들어오면 마당이 꽤 넓은 한옥이었다. 주인집은 높은 대들보에 기다랗게 방이 몇 칸 있었고 우리 방은 마당 가장 안쪽에 있는 방이었다. 그 집에서 나와 6살 차이 나는 막내가 태어났다. 어린 조카들이 예뻐 죽겠어서 신당동에서 수시로 드나들던 이모가 자고 가기도 했으니 여섯 명이 누울 수 있는 크기의 방이었다. 살림살이는 작은 장롱 하나가 기억난다. 그 집에서 떠오르는 기억이 몇 가지가 있다. 당시 변소는 쭈그려 앉는 변소였는데 변소가 깊어 변소 갈 때마다 무서웠고 똥 누는 동안 내내 긴장을 해야만 했다, 크리스마스 때 산타 선물이 양말에 들어 있었는데 엄마와 아버지가 짓궂게 내 동생 양말에 신문지를 꼭꼭 넣어놔서 동생이 ‘왕’하고 울음보를 터뜨리자 엄마가 캐러멜을 내주는 걸 보고 산타가 선물 갖다 놔준다는 게 거짓말인 걸 알았다는 기억, 그리고 물난리 때 피난 갔던 기억, 그리고 지금 말하려는 장면이다.
어린애들이 마당 수돗가에서 세수하기는 추운 겨울이었다. 엄마는 큰 대야에 뜨뜻한 물을 담아 방에 넣주었다. 그러면 나와 내 밑의 첫째 남동생이 먼저 세수하고 그다음에 발을 씻었다. 방 바로 밖에 수돗간이 있었다. 추운 겨울 말고는 늘 수돗가에서 씻었을 텐데 그 장면들은 기억이 안 난다. 엄마가 넣어 준 큰 대야 뜨뜻한 물로 나와 동생이 차례로 세수하고 발 씻던 생각만 난다. 그 기억은 따뜻함이다. 그 따뜻함은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걸 느끼는 데서 오는 따뜻함이다. 이 느낌을 온전하게 표현하고 있는 노래가 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받고 있지요.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받고 있지요.’
나의 두 부모님은 이 노래처럼 충만하게 자식을 사랑해 준 분들이셨다. 그날의 대야의 뜨뜻함은 나를 아마도 내 동생들도 평생을 뜨뜻하게 덥혀주고 있다. 이 뜨뜻함은 엄청난 백이다, ‘나는 말이야, 이렇게 귀하게 사랑받고 자란 사람이야’라는 뻐김 비슷한 감정이 내재되어 있다. 이 뻐김 감정은 나를 평생 자신감 있고 당당한 사람으로, 공동체성을 지향하며 살아가게 하는 원천수(原川水)이다. 이처럼 든든한 백이 또 어디 있을까?
3. 부족함과 과오도 많았지만 공동체를 지향하면서 살아온 삶
17살에 생모가 돌아가시고 삶은 부조리라는 까뮈류의 실존주의에 심취에 한 동안 살았지만 대학에 들어와
독서클럽 활동을 통해 한국의 근대사와 모순을 알게 되었다.
난쏘공, 광장, 당신들의 천국, 장마, 3대, 그 많은 싱아를 누가 먹었는가, 토지 등등의 소설. 운동권 학생이 되었다. 80년 좌절된 서울 봄에는 광주 시민과 하나 되는 길을 택해 감옥에 가도 좋다는 각오로 필경을 하여 등사기로 광주사태 실상을 기록한 유인물을 만드는 일을 했다. 밖으로 가져가 뿌리는 일은 남자 애들이 했다. 조작된 김대중 내란사건에 연루된 선배 부부를 숨겨줘 물고문도 당했다. 이 끔찍한 고문 기억으로 운동을 더 못할 거라고 생각을 했음에도 4학년이 돼서는 시국 상황을 분석한 유인물을 만들어 후배와 화장실을 돌아다니며 뿌리기도 했다. 여성학을 하면서 동료들과 한국성폭력상담소 설립을 거들었고 피해자상담 활동을 얼마 동안 하였다. 대학원 다니면서 1년쯤 인천 만석동 공부방에 자원활동을 나갔다. 아이를 낳고는 내가 일하는 동얀 아이도 행복해야 된다는 생각에서 공동육아를 시작했고 공동육아 연구원 부원장으로 공동육아 어린이집 운영의 기본 틀을 잡는데 매진했다. 학교에 있을 때는 현장과 함께 하는 연구자이고자 노력했다.
학교에서 나오면서 가배울을 만들었다. 여성주의 문화답사 단체로 출발했으나 토종을 만나면서 토종농사 농민과 함께 하고자 토종 살리기 단체가 되었다.
어머니 문화의 정수가 토종농사라 봤기 때문이다. 이 일이 여러모로 부족한 내게 역부족이었는지 아니면 고문의 뒤늦은 후유증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힘든 병을 앓고 있다.
과제 투성이의 과제들을 강 이사장에게 던져 놓고 비로소 치유에 집중하고 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가배울이 토종농사 농민들과 함께 계속해서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 할 뿐이다.
부족함 투성이고 부끄러운 과오들도 있지만 인생의 굵은 줄기에서 공동체성을 저버리지 않으며 살아오게 한 그 힘은 무엇일까? 그 겨울날의 방안에서의 세수, 그 이후에도 나는 최고의 사랑을 받았다는 내면의 뻐김을 간직하게 해 준 부모님의 사랑의 장면 장면이 떠오른다. 사랑받은 사람은 공동체를 지향한다. 공동체는 관심과 사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