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지켜준 힘
엄마는 내가 17살에 엄마 나이 서른일곱 살에 신부전증으로 돌아가셨다. 평생 이어지는 모녀관계에 비하면 짧은 기간에 받은 사랑이었지만 그 사랑은 나를 그리고 동생들을 평생 지켜주기에 모자람 없는 짙고 짙은 사랑이었다.
우리가 청계천 단칸방 전세 시절을 뒤로하고
이사 간 두 번째 집은 용산대로변에서 조금 들어간 시장통 입구에 있는 일본식 2층집이었다. 그 집은 아버지가 청계천 고물 노점상에서 전선 가게를 열 수 있을 정도로 자수성가하며 번 돈으로 처음으로 산 집이었다. 1층에 점포가 있었고 쌀가게 하는 분에게 세를 주었다. 거기서 2~ 3학년을 다녔는데 전학을 몇 번을 다녀서 그런지 그 학교 이름은 기억이 희미한데 아마 영본국민학교였던 거 같다.
학교 가는 길에 양장점이 있었다. 추석을 앞둔 어느 날 엄마는 나를 데리고 가서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 주었다. 아마도 그 시절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 입는 아이는 흔하지 않았을 거 같다. 그리고 엄마는
아침이면 나와 2년 밑의 둘째 남동생 6년 밑의 막내 남동생 셋을 데리고 동사무소로 향했다. 막내는 엄마가 포대기로 업고 갔다 엄마는 동사무소에서 양재를 배웠다. 엄마가 양재를 배우는 동안 우리 셋은 의자에 앉아 수업 듣는 엄마 옆 마루 바닥에 앉아서 놀았다. 막내 보는 게 내 일이었다.
매일인지 주 몇 회인지 한동안 셋을 데리고 가 양재를 배울 수 있었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신기하다. 그리고 참으로 부지런한 엄마였다. 애 셋을 챙겨서 데리고 출근한 셈이니~ 담당 공무원도 참 좋은 사람이었을 거고.
수업이 끝나면 엄마는 동사무소 앞 떡집으로 우리 셋을 데리고 갔다. 우리는 거기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시루떡을 점심으로 먹었다. 이후로는 그렇게 김이 무럭무럭 나는 시루떡을 먹어본 적이 없다. 그렇게 시루떡으로 배를 채운 나는 오후반 수업을 하러 학교로 갔다. 그때만 해도 교실이 부족해서 한 반 아이들이 50~60명은 됐던 거 같다. 그리고 오전반 오후반이 있었다.
국민학교만 졸업한 엄마에게는 동사무소 양재 수업만으로는 배운 내용을 다 따라가기가 힘들었던 거 같다. 엄마를 따라서 같은 수업을 듣는 아줌마 집으로 몇 번을 따라갔다. 엄마는 그 아줌마에게 다시 상세하게 설명을 듣고 나를 데리고 귀가를 했다.
그 아줌마는 고졸이라고 했고 아직 아기는 없었다. 그렇게 해서 엄마는 양재와 기계 뜨개질 과정까지 다 수료했다.
내 원피스는 엄마의 첫 작품이었다. 나는 엄마가 해준 원피스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분홍색과 하얀색이 번갈아 긴 줄로 난 천으로 만든 원피스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엄마가 나한테 처음 만들어준 옷이다. 근데 엄마가 이후 동생들 옷을 만들어줬는지 기억이 나지 않으니 기억이란 게 참 자기중심적이다. 아마 만들어줬을 거 같다. 그리고 많이 입었던 게 엄마가 짜준 털 스웨터와 털 바지이다. 엄마는 뜨개질 선수였다. 눈 감고도 뜨개질을 했다. 그렇게 짜 준 스웨터와 털바지를 입고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이런 훌륭한 뜨개질을 누가 해줬냐고 내게 물었다. 그래서 우리 엄마 뜨개질 솜씨가 보통이 아니란 걸 알았다.
여성학 공부를 하면서 왜 여성학을 하게 되냐는 토론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고 강의할 때 성의 사회화에 대한 과제로 자신이 경험한 성차별을 써오라는 리포트는 필수로 주었다. 의외로 집에서 오빠나 남동생과 비교해서 받은 차별을 말하는 선후배, 동기, 학생들은 부지기수였다. 우리 집에서 나는 성차별을 받은 적이 없다. 왜 성차별이 없었을까? 아버지가 홀어머니와 살아서였던 거 같다. 아버지가 가부장제 문화를 전수해 줄 아버지가 없는 가족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엄마는 내가 만드는 실과 숙제를 하면 빼앗아 대신해 주면서 "네가 크면 이런 건 다 사서 쓸 거야. 이런 시간에 책이나 더 봐라" 하셨다. 선견지명이 있는 여성이었고 자신의 못다 한 공부는 딸이 해주기를 은연중에 주술을 걸은 거였다.
나는 이 주술 때문에 내가 박사를 했다고 생각한다. 대신에 엄마의 살림 재능을 물려받지 못한 어설픈 에코페미니스트가 되긴 했지만~
암튼 엄마는 내게 온전하고 충만한 사랑을 주었다.
이 사랑을 자각하고 감사함을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내가 어른이 됐을 때 이미 엄마는 내 옆에 없었다.
가랑비에 옷 젖듯 법문을 듣고 경전을 읽으며 윤회를 믿게 된 나는 가끔 내 주변의 영민하고 의욕에 찬 나보다 젊은 어떤 여성이 엄마의 환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 엄마에 대한 그리움일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