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사는 집 08> 6살 소녀의 모험심도 언젠가는 변하는 거겠지
여섯 살 때 아빠가 동화책 한 권을 읽어주었다. 멕시코에 숨겨진 보물 이야기였는데, 해적 선장이 보물을 숨겼고 보물을 숨긴 장소까지 지도로 표시되어 있었다. 상식적으로 이건 그냥 동화책의 이야기일 뿐이었지만, 나는 그 책을 보고 정말 현실의 이야기라 생각했다. 그리고 부모님 몰래 지도를 쭉 찢어 가방에 숨겼다. 그 이후 머릿속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멕시코로 떠나야겠어. 보물을 찾아 큰 부자가 되겠어”
음, 하지만 나는 멕시코에 가지 못했다. 집에 놀러 온 이모에게 멕시코로 떠난다고 롯데리아 햄버거 좀 사달라고 했는데, 그 사이 엄마 아빠에게 일러버린 것이다. 출발 당일, 나는 현관문을 나서지도 못하고 아빠에게 붙잡혀 버렸다. 이런 젠장. 부자의 꿈이 한 번에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뭔가 억울해진 나는 아빠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아, 왜 붙잡아. 부자 좀 되겠다는데!”
/
부자에 대한 나의 열망은 6살의 그 '멕시코 사건'을 이후로 한참을 끊겨 있었다. 아빠 엄마는 나를 ‘예술가적 소양이 있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었던 건지 피아노, 바이올린 등의 다소 한량적인 취미에 흥미를 붙여주었다. 덕분에 나는 고2 때까지 피아노를 전공하겠다고 돈을 옴팡 썼고 (교수 레슨비로), 대학 입학 때는 99% 백수만 양성한다는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만약 내가 백종원 씨처럼 어릴 때부터 꾸준히 용돈 기입장을 쓰거나, 공병을 모았다면 적어도 스무 살 때 멕시코로 가는 비행기표 정도는 사지 않았을까 싶은데…. 아무튼 나는 그렇게 돈을 버는 방법에 욕심을 내지 않았고, 때문에 큰 부가 내게 온 일도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빠는 내가 생활에 찌들지 않게 살길 바랬다고 했다. 고만고만한 공무원 월급이지만, 아빠 울타리 안에 있을 때는 문화적 취미들을 맘껏 누리기 바랐던 것 같다. 대학에 가서도 아빠는 내가 알바를 한다고 하면 정말 펄쩍 뛰었다. “그깟 돈 몇 십만 원 벌자고 힘들게 일해? 아빠가 어떻게든 돈을 마련할 테니 그 시간에 열심히 공부나 해" 물론 그깟 몇십만 원도 아니지만 (몇십만 원이나 되는 거지만), 살짝 엉뚱하고 한량적인 기질이 있었던 나는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공부를 하지도 않았다.
이후 긴 백수 시절을 보내며 또 아빠 카드를 썼고, 어렵게 직장에 들어가서도 약 1년 간은 정신 못 차리고 피부과에 돈을 퍼부었다. 정신이 좀 들었던 2년 차에 돈을 모으기 시작했던 것 같은데, 이때부턴 또 전업 글쟁이가 되겠다고 큰 소리를 빵빵 쳤다. 이쯤이면 내 딸이라도 “웃기고 자빠졌네”하며 머리를 쥐어박을 것 같은데, 더 놀라운 것은 아빠의 반응이었다. “아유, 우리 둘째 딸이 작가가 되겠다고? 그럼 아빠가 받은 몽블랑 펜이 있는데 그걸로 글 좀 써봐. 나도 선물 받았는데, 뭐 내가 그걸 쓸 일이 있어야지”
/
물론 양심상 몽블랑 펜은 받지 않았다. 그리고 아빠의 마음에 감동을 한 나는 직장을 다니며 첫 번째 책을 낸다. 총 101군데의 출판사에 기획서를 써서 어렵게 출간한 책. 하지만 그 책은 출간 2주 만에 매대에서 사라졌다. 아쉽게도 마케팅 비용이 없었던 출판사는 내 책을 매대에서 지킬 돈이 없었다.
첫 책이 시원하게 망하고 솔직히 절필을 할까 했는데, 이번엔 아빠가 살짝 바람을 넣었다. “아유, 우리 이 작가님. 다음 책의 주제는 뭔가요?” 아빠는 내가 자랑스러웠던 거다. 직장생활을 하며 틈틈히 책을 쓴 나의 열정이 말이다. 이미 아빠의 지인들은 내가 책을 낸 것을 다 알고 있었다. (심지어 구매까지)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이번엔 정말 잘 준비해서, 대박을 터뜨리는 거야!” 그래서 일 년 후에 두 번째 책을 다른 출판사와 내게 되었는데? 처음보다 확실히 성장하긴 했지만 역시 엄청난 대박은 아니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이, 내 책을 기다리던 아빠가 돌아가셨다.
/
사실 부자가 되려면 나는 이 글을 쓰지 않는 게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미 책을 써 본 많은 작가들은 책 속에서조차 한탄을 한다. “나보다 먼저 성공한 친구들을 보며 묘한 생각이 들었다. 글을 계속 써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한 작가는 두 번째 책을 어마어마한 베스트셀러를 만들며 (무려 104쇄를 찍었다) 이런 인터뷰를 한다. “이번 책이 망해도 전 글을 썼을 거예요. 글을 쓰는 걸 좋아하기에 절대 멈추지 않았을 겁니다” 나는 그녀가 부럽다. 진짜 부자가 되었으니, 그런 말도 당당히 할 수 있는 거겠지.
부자가 되는 법은 아직 모르지만, 두 번의 책을 쓰며 얻은 것은 바로 ‘현실 감각’이다. 책을 써서는 쉽게 부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아빠가 계시지 않은 지금 이 순간, 엄마를 잘 모시기 위해서라도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 말이다. 때문에 회사를 잠시 휴직하는 동안 공인중개사 자격증이라도 따려고 책을 샀는데, 인터넷에서 강의를 들으려다가 그 공고문을 보고 말았다. “브런치 북 출간 프로젝트…작가님께 모든 과정을 지원합니다’’ 젠장, 이건 정말 벗어나기 어려운 피라미드 조직같군.
/
글을 쓰는 것엔 늘 계기가 있다. 아빠와의 추억을 휘발시키지 않기 위해, ‘글로 집을 지어보겠다’는 결심은 벌써 몇 달 전부터였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막상 컴퓨터에 앉아 글을 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또 다시 글을 쓴다. 이 책의 목적은 부와 명예란 말도 안 되는 욕심에 눈멀었던 첫 번째, 두 번째 책과는 확실히 다른 것이다. 이건 그냥 내게 숙제 같은 거다. 나부터 속 시원해지려는 일종의 치유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글의 최대의 장점은 이것이다. 애써 자료를 뒤적이거나 좋은 명언을 어렵사리 끌어오지 않아도 된다는 점. 왜냐하면 (아빠와의) 너무 풍부한 추억들이 내 몸속에 저장되어 있어 그냥 꺼내면 그만이다. 아마, 글 쓰는 기술로는 가장 졸작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준비한 에피소드를 다 쓰고 나면, 나는 당분간 공인중개사 공부를 할 것 같다. 그 역시 부자는 못 되어도 자격증 하나는 따 놓을 수 있다는 실용성을 위해서다. 서른 중반을 넘긴 나는 이제 멕시코에 갈 마음도 없지만, 혹시 멕시코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보물 대신 부동산부터 둘러볼 것 같다. 철 없이 나이만 들었던 어느 아줌마는 이렇듯 천천히 현실을 알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