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순간들

Part 2. 예술판 생존의 기술

by 신나

터치 한 번으로 전 세계를 누비고, 질문 한 번이면 박사 수준의 지식을 얻고, 상상 속 풍경을 눈앞에서 마주할 수 있는 세상. 이 얼마나 경이로운 문명의 시대인지.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

모든 것이 디지털 화면 안에 구현되는 시대에 우리는 왜 여전히 직접 비행기를 타고 가서 두 발로 낯선 땅을 밟고 싶어 하지?

왜 복잡한 고민과 아이디어를 노트북 자판 대신 노트에 직접 손으로 쓰고 싶어 하는 거지?

그림과 작품으로 상상력을 물리적으로 표현하고, 공연과 전시를 기어이 찾아가 온몸으로 경험하고 느끼고 싶어 하는 이 원초적인 욕구는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답은 명확하다. 그 어떤 첨단 기술도 '직접 경험'만큼 강렬한 감각과 감정의 자극을 선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술이 간접 경험의 한계를 부술수록, 인간은 역설적으로 직접 경험의 가치를 더욱 간절히 찾는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문화 예술 기획자의 진정한 역할이 시작된다.


<Imagine>

나는 전시나 페스티벌을 기획할 때, 눈을 감고 상상한다. 마치 최신 VR 기기를 착용한 것처럼 가상현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B'라는 가상의 관객이 되어본다. 인스타그램 피드 속에서, 친구와의 대화 속에서, 혹은 도심 빌딩의 거대한 광고판 속에서 마주치는 프로젝트 이미지, 그 첫 순간부터 상상하기 시작한다. 정보를 찾아보고, 예매를 하고, 그날을 기다렸다가 마침내 현장을 찾아오는 그 모든 여정을 순차적으로 그려보는 것이다.


공연-전시장을 찾아오는 길은 어떨까? 누구와 함께 올까? 식사는 무엇을 할까? 비가 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혹여 교통 체증이라도 발생한다면? 현장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무엇이어야 할까? 안내 직원은 얼마나 다정한 인사로 맞아줄까? 작품을 보고 나온 뒤에도 그 감동을 이어갈 굿즈는 과연 구매하고 싶을까? 돌아간 뒤에도 마음에 울림을 주는 메시지가 남아 있을까? 이렇듯 수많은 상황과 선택지를 가정하고, 그에 맞는 맞춤 기획을 구상한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가상 관객 'B'의 일상생활을 상상한다. 평소 좋아하는 취향은 어떤지, 어떤 책을 즐겨 읽고 어떤 음식을 선호하는지, 그의 일상적인 루틴은 어떠하며, 자주 찾는 공간은 어디일지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야만 이 공연이나 전시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브랜드 메시지를 그의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할 수 있는 방법들이 떠오른다.


일상에서 발견하는 작은 터치가 주는 감동은 생각보다 훨씬 크다. 그러니 기획자는 그 작은 '터치' 하나를 위해 수만 번의 시뮬레이션을 돌려봐야 하는 것이다.


<파라다이스 아트랩 페스티벌 포스터 이미지>
<2022 파라다이스 아트랩 페스티벌 작품 : IVAAIU CITY-Interplanetary Light Code - Model 2>

실제로 나는 '파라다이스 아트랩'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이처럼 관객 분석과 리뷰를 통해 기획의 방향을 재정립한 사례가 있다. 파라다이스 아트랩은 예술과 기술의 융합 작품을 지원하여 예술가들에게는 작업의 확장 기회를, 관객들에게는 새로운 경험을 제공해 온 사업이다. 2018년 시작하여 3회 차를 맞던 해에 아카이브 책을 발간하게 되었다.


보통 아카이브 책이라 함은 작품 사진과 작가의 인터뷰를 모아놓은 예쁜 디자인 서적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파라다이스 아트랩의 미래 예술 작품들은 그 이미지만으로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형태 거나 미래에 대한 범 우주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실제 관객들은 작품을 '어렵고 무섭다'라고 느끼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작품들은 결국 '작가'라는 '사람'이 만들어내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고민 끝에 새로운 아카이브 책을 착안했다. '작품' 자체보다는 '작가'라는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하기로 말이다. 디지털 매체와 인공지능이 난무하는 시대에 역설적으로 가장 아날로그적인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작가 인터뷰집을 발간했다. 어렵고 무서운 이미지를 벗고, 사람 냄새나는 다정하고 쉬운 방식으로 대중에게 다가가고자 했다.


당시 온갖 출판사들을 만나 기획안을 제안했지만, 준비 기간이 짧기도 했고 우리의 콘셉트가 출판사들의 전통적인 사업 방향과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아 여러 차례 포기를 강요당해야 했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에라이!' 하는 심정으로 직접 출판사를 등록하고, 발간까지 강행하게 되었다. 무모한 도전으로 시작한 출판업은 수많은 우여곡절과 고난을 안겨주었고, 그 과정에서 나는 출판 기획자들에 대한 깊은 존경심도 갖게 되었다. 그렇게 어렵게 탄생한 이 책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꾸준히 판매되고 있다. (물론, 판매 부수는 소량이지만 말이다.)

<파라다이스 아트랩 '예술기'도서>

이와 동시에 또 다른 책도 준비했었다. 파라다이스 아트랩 페스티벌의 미래 관객이 될 아이들을 위한 동화책이었다. 아이들 및 가족 대상 프로그램은 단순한 워크숍 수준으로만 진행해 왔기에 늘 아쉬움이 남았다. '조이'라는 캐릭터를 개발하여 아트랩의 브랜드 메시지를 담은 스토리를 만들고 그림책으로 출간했다. 이제 '조이'는 단순한 그림책 캐릭터를 넘어 교육 프로그램은 물론, 굿즈와 디저트에까지 활용되는 핵심 콘텐츠 IP로 성장했다.

<파라다이스 아트랩 '조이의 기억상자'도서>

이처럼 '서사가 있는 경험을 설계하는 것'이야말로 문화 기획자의 중요한 관점이고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사람과 환경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깊은 애정을 가지고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 그리고 자기 스스로도 직접 경험하고 나누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미 이 분야의 '능력자'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글/그림 신나]



문화 기획자의 인생큭큭장 ☞

<후배에게: 관객은 모르고, 예술가는 말하지 않는 것들>


Prolog: 문화 기획자가 뭔데? (feat. 어느 날 찾아온 후배 놈...)


Part 1. 진짜 이 일 하고 싶니?

왜 하필 문화 기획자? 딴 거 할 거 많잖아

예술, 정답이 없는 특별한 곳


Part 2. 예술판 생존의 기술

화려함 뒤에 감춰진 현실의 민낯

다름을 이해하는 시선: 장르와 공간 1

다름을 이해하는 시선: 장르와 공간 2

혼자가 아닌 우리: 협업의 가치

여성 기획자로 살아온다는 것

문화 기획자의 파워루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순간들


Part 3. 예술가와 조직 사이, 멘털 지키는 법

예술가와 대화는 통역이 필요해

예술가한텐 친구, 조직한텐 충신?소통은 너무 어렵다

꼰대 되기 싫으면 눈치 챙기고, 요즘 트렌드 읽기

관객이 주인공이야

선배? 후배? 결국 '한 배' 탄 동지들


Epilogue: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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