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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오킴 Oct 14. 2020

가을 한가운데서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면서 내 마음도 조금 편해졌나 보다.

집 밖을 거의 나가지 않던 내가 걷기 시작했다. 

동네 골목길을 지나 대공원까지... 

입구를 지나 그 넓은  공원의 모든 갈래길을 다 섭렵하기라도 하려는 듯 

그렇게 꼼꼼히 챙기며 걷는다.


내 집 앞에 이리 좋은 곳이 있었다(뿌듯).

가끔씩 친구가 또 사촌동생이 나를 만나러 일부러 여기까지 와줘서 함께 걸었었다.

길치인 내가 그나마 이렇게 용기 낼 수 있었던 것도 이미 걸어본 경험치 덕분이다.

함께 걸었던 기억을 소환하며 다시 걷는 이 길...

가을이 한층 더 깊어졌다.


나뭇잎들은 이제 옷을 알록달록 갈아입고 있는 중이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속도만 다를 뿐 결국 가는 길은 같다.

이 친구들이 완벽하게 변신을 끝마쳤을 그날을 그려보니 

숨이 막히도록 눈부시다.

나뭇잎에게 말을 걸어본다.


네 생애 최고의 순간을 내가 함께 해주마.

갈래갈래 난 길들을 왔다 갔다 세심하게 다 걸어주고(혹시라도 빠뜨리면 삐질세라 ㅋ) 

유난히 인적 드문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커다란 떡갈나무들이 곳곳에 서 있는 게 참 운치 있다. 

이 가을에 딱 어울리는 공간.

아름드리 떡갈나무 아래 파란 의자 하나가 동그마니 놓여있다.


분명 나를 기다렸으리라.

다가가 앉는다. 

최고의 뷰다.

누군가 이곳에서 한참을 앉아서 가을을 만끽했으리라.

나는 뒤를 이어 그 자리를 지켜주었다.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니 나뭇가지 뒤로 시리도록 파란 가을 하늘.

아... 가을이다.

정말 가을이 오롯이 내 안에 들어오는 순간이다.


며칠 전 인스타에 올리고 한동안 계속 입으로 되뇌었던 

안도현 님의 시가 다시 내게로 왔다.


가을의 소원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만물박사 페벗님이 알려준 것...^^


잠자리는 날개를 펴고서 살아있을 때의 모습 그대로 앉아서 죽는단다. 

그렇게 반듯하게 산화하는 잠자리...

잠자리의 생을 떠올리며 드는 생각.

나도 그렇게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 그대로 이 생을 마감할 수 있었으면... 


가을은 이렇게 

문득문득 내 생의 끝을 생각하게 한다. 

가을만의 깊이 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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