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하 시인은 왜 ‘희망’을 말하지 않았을까!

by 지오킴


“내 시집에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 이산하 시인의 시집 [악의 평범성] 맨 마지막 문장이다. 이 한 줄이 의미심장하게 내 마음에 콕 박혔다. 시들의 여운 탓인지 자꾸 나를 붙든다. 이 문장이. 정리되지 않은 채 내 안에서 유영하는 이 상념들.


시집의 첫 번째 시에 나오는 벤야민과 니체처럼 ‘표면이 심연인 듯 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울보가 맞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시집이었다. 참 가슴 아프게 읽었다. 나는 그 시들을.


편하게 읽히는 시가 한 편도 없었다. 다 너무 힘들게 넘어야 하는 아픈 시였다. 시를 다 읽고 난 내 머릿속에 드는 질문 하나. 고통의 시간을 견뎌온 시인이 이제는 미래를 향해 ‘희망’을 쏘아 올릴 법도 하건만 시인은 왜 끝내 그 ‘희망’을 담아내지 못했을까.


시에 대해선 문외한인 내게 시인은 침묵하는 자였다. 침묵이 말의 가장 위대한 특성이라고 한 하이데거의 영향이었을까? 시를 사랑했던 이 철학자는 시인의 언어에서 침묵을 핵심적 위치로 놓았으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 오랜 침묵 끝에 세상에 나온 이산하 시인의 언어는 인간의 무의식을 건드리는 것처럼 보였다. 내게는 그랬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천착하고 그 기원 속 무의식의 다양한 기표들을 건져내 시에 담은 느낌. 마치 니체가 모든 좋은 것들(善), 도덕이니 미덕이니 하는 것들 배후에 숨은 나쁜 것들(惡)을 얘기하듯 [악의 평범성]은 표면에서 심층 속으로 들어가 어둠을 드러내는 시로 읽혔다.


고도로 발달된 산업 자본주의 사회에서 눈에 보이는 것에만 함몰된 현대인들에게 이 현실에서 은폐된 인간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그 기원으로 돌아가자고 말 거는 것만 같았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희망은 과거의 잃어버린 고향에 있다’고 했다. 결국 나의 미래는 과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나온다는 것.


당신이 꿈꾸는 세상과 괴리가 너무도 컸던 현실의 부조리 속에서 시는 살아 움직이며 시인의 언어로 그 존재를 드러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희망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임을 선언하면서 말이다.


나에게 온 [악의 평범성]의 시들은 의식과 무의식의 틈에서 줄타기하며 인간의 비애와 마주하게 했다. 그것은 우리 인간에게 내재된 선악의 경계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처절한 역설 아래서 절망도 희망도 차마 뱉어내지 못하는 낮은 울음소리(緘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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