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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임 Jan 21. 2024

'역마살' 말고 '여행'이라고 해줍시다

프롤로그

브런치에서 글을 올리고 댓글과 답글을 올리며 서로의 글에 예를 갖추는 사이로만 지낼 줄 알았다.

그런데 글을 마주 읽으며 반가운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요상한 일이었다.

여기에 글을 올린 지 6개월이 지났고 1년을 더 만나게 될지, 아니면 5년 더는 10년을 만나게 될지 모르는 사이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 않다.


그러다 오래전 나의 친구들이 스쳐갔다.


난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살았다.

오죽하면 이삿짐 싸는 일이 그렇게 번거롭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이런 나에게 사람들은 '역마살'이 들었다고 했다.


‘역마살: 늘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팔자.’ (출처 네이버 오픈사전)  

   

날 보고 말하길 ‘팔자네 팔자야.’라며 ‘이제는 어디 안 가?’라고 물어본다.

그 말에 ‘지금은 살겠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누가 알겠어.’하고 나도 알 수 없는 내 미래에 대한 걱정을 조금 해보기도 한다.     


30년 넘게 고향 떠나 살고 있으니 내가 생각해도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구나!’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그렇다고 직업 때문에 여러 지역을 돌아다녀야 하는 일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비행기 타고 먼 나라에 살기도 하고 산속에 들어가 두문불출하는 때도 있었다.


참 많은 사람과 만나 함께 살았고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내가 처음 먼 거리로 떠나던 1990년대 초, 집에서 20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에 살았을 땐, 인터넷이란 것은 없었다. 내가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소식을 전하며 살 수 있었던 수단은 전화와 편지뿐이던 시대였다.

그렇다고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 때에 만났던 친구들도 가끔 SNS를 통해 ‘잘살고 있구나.’라고 확인하는 정도라고 해야 하나.

가끔 문자나 남기고 혹여라도 동시 접속상태가 되면 간단한 통화 정도일 뿐, 그 먼 거리를 달려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마지막 경유지였던 호주에서 자매처럼 지내던 친구에게 안녕을 고하기 위해 만나던 날, 그녀가 물어봤다.

“왜 꼭 돌아가야 해?”

“부모님과 아들 그리고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잖아.”

“우리는?”

그 질문에 난 할 말이 없었다.

“우리는 너의 친구이고 가족처럼 지내는 사이인데. 더군다나 너의 동생도 호주에서 살고 있잖아.”

“그래도 아들이 기다리니까. 미안해.”

그런 가족 같은 친구들을 뒤로하고 난 부메랑처럼 목표했던 바를 이루면 고향으로 돌아갔다.

아들을 핑계로 대는 건 그냥 돌아가고 싶은 향수병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들이 없던 젊은 시절에도 난 부메랑이었다.     


어쩌면 역마살보다는 역마직성 같은 내 성격 때문에 사람들과 기쁨 그리고 슬픔이 공존하는 만남이나 헤어짐을 하는 것은 아닐까?     


12월이 지나고 아직 태음력 1월 사이 애매한 1월에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기억을 헤아리려 한다.     


‘친구야 잘 지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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