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서 스치다, 쇼팽 천사님, 배팅 vs 회군
# 거리에서 스치다
제19회 국제 쇼팽 피아노 콩쿠르 본선(Round1~Final) 직관 표는 작년 10월 판매 개시 이후 매진되었다고 했다. 그래도 취소표는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근거 없이 서로를 다독이며 바르샤바까지 오지 않았겠는가. '표 없이 왔으니 해야 할 일을 해보자.'
바르샤바에 도착한 둘째 날(10월 5일 일요일), 전날 산 샐러드와 요거트를 아침 식사로 챙겨 먹고 아침 8시 30분쯤 숙소를 나섰다. 역시나 공기가 꽤 차갑게 느껴졌지만, 전날과 달리 밝은 아침의 바르샤바 거리를 둘러보면서 걸으니 기분도 한결 밝아지고 바르샤바가 조금 더 편하게 느껴졌다.
어젯밤에는 내가 당장이라도 돌아가자고 말할 것 같은 표정이었어서 걱정을 많이 했다고 말하는 짝꿍도 나도, 바르샤바가 이제 조금 더 편하게 느껴진다고 말하며 필하모닉 홀(Filharmonia Narodowa) 방향으로 걸어가던 중 횡단보도에서 멈춰 섰다. 관광 도시와는 달리 동양인이 꽤 드물게 보이기 때문인지, 어디에서든 우리와 비슷한 분위기의 동양인이 보이면 약간의 안도감을 느끼면서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시선이 잠시 머물기도 했다. 우리처럼 이른 아침에 움직이시는 맞은편 동양인이 괜히 친근하게 느껴졌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보행자 신호가 끝나갈 즈음, 나는 그제야 알아차렸고 너무 놀라 벌어진 입으로 "헉!" 소리를 내뿜으며 뒤를 돌아봤다. 맞은편에 서 있던 친근한 느낌의 동양인은 바로 우리나라 본선 진출자 세 분 중 한 분, 피아니스트 이관욱 님이었다. 그 순간 다시 횡단보도를 건너 뛰어가면 인사도 하고 직접 응원의 말도 할 수 있었겠지만, 어안이 벙벙하기만 하고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전혀 모르셨겠지만,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며 마음으로 열심히 응원했다. '현장에서 응원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내일 무대에서 지금까지 준비해 온 모든 것을 다 보여주세요. 끝까지 힘내주세요!!'
# 쇼팽 천사님
거리에서 우연히 귀인을 볼 수 있는 바르샤바는 대체 어떤 곳인가에 대해 짝꿍과 흥분한 상태로 이야기하며 걷다가 필하모닉 홀 근처 카페에 들렀다. 한기를 따뜻한 음료로 녹이고 싶었다. 역시 비슷한 생각으로 카페에 들른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근처 다른 카페에는 다행히도 자리가 있어 따뜻한 맛차 음료와 디저트로 한기를 녹였다.
취소표 현장 발매는 세션 10분 전부터 시작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오전 9시 50분부터 시작될 테니 너무 일찍 가지 말고 발매 시간에 적당히 맞춰서 가자고 이야기했다.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카페를 나와 필하모닉 홀에 도착하니 9시 30분 즈음이었다.
'쇼팽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 마음 하나로 모여드는 바르샤바 필하모닉 홀 근처에 가볼 수만 있다면, 직접 볼 수 있다면.' 2015년 제17회 쇼팽 콩쿠르 이후부터 간직해 온 로망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곳에 직접 왔고, 직접 본 것이다. 로망이 실현된 순간이었다. 표를 구하지 못하더라도 조금 아쉽긴 하겠지만 괜찮다고 생각했다.
필하모닉 홀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직관 표가 없어 취소표를 사기 위해 만든 줄¹이었다. 우리는 줄을 섰다. 여기에 줄을 서는 게 맞는지 몰라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바로 앞에 서 있던 한 남성분이 우리에게 표가 있는지 물었다. 없다고 답하니 그럼 여기 서는 게 맞다고 했다. 그분은 우리가 온 후에 도착한 사람들 모두에게도 표가 있는지 물으며 여기에 서는 게 맞다고 확인시켜 주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새로운 유형의 친절함²이었다. 아직 필하모닉 홀의 문이 열리지 않은 건가 생각하며 서 있는데, 바로 앞의 그분이 우리에게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답했고, 그분께도 물어보니 그분은 폴란드 현지인이었다.
그분은 전날에도 여기 필하모닉 홀 앞을 지나갔었는데 역시 줄을 선 사람이 꽤 있었다고 했다. 짝꿍이 바르샤바에서 추천하는 장소를 물어보니, 그냥 거리를 많이 걷는 게 좋다고 말하며 쇼팽박물관을 비롯하여 여러 장소를 추천해 주었다. 또한 이 기간에는 콩쿠르 연주자가 참여하는 연주회도 열린다는 사실, 문화과학궁전 근처의 가볼 만한 레스토랑 등 줄을 서서 앞쪽으로 나아가는 내내³ 바르샤바와 콩쿠르에 대한 정보를 가득 알려주었다. 휴대폰과 구글 지도만 믿고 있었을 뿐 바르샤바에 대한 정보가 전무했던 우리를 안쓰럽게-답답하게 여긴 누군가가 천사님을 보내신 건가 상상하게 될 정도로 감사하고 감격스러웠다. 나중에 우리는 그분을 쇼팽 (이 보낸!?) 천사님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아침 세션이 시작된 즈음에, 드디어 바르샤바 필하모닉 홀 안으로 입성했다. 쇼팽 천사님은 홀 안을 둘러보다가 잠깐 기다려 달라고, 그리고 자신의 자리를 확보해 달라고 하더니 계단 위쪽에 마련된 안내 데스크로 갔다. 안내 직원들과 한동안 대화를 하더니 돌아와서 우리에게 전날과 당일 발매된 쇼팽 콩쿠르 신문⁴을 주었다. 기다리면 들어갈 수는 있을 것 같다고도 했다. 하지만 본인은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줄을 서기 시작한 지 한 시간이 훌쩍 지나 두 시간이 가까워지는 시각이었다. 먼 곳에서 날아와 아무것도 모르면서 직관 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선 가여운 여행자들에게 바르샤바와 쇼팽 콩쿠르에 대해서 성심성의껏 설명해 주고 정보도 알아봐 준 쇼팽 천사님, 그분을 만난 일은 너무나도 큰 행운이었고 그분 자체가 선물이었다. 우리도 한국에서 만나게 되는 여행자들에게 쇼팽 천사님처럼 낯선 곳에서의 우연한 만남을 따뜻한 행운으로 만들어주자고 깊이 다짐했다.
¹표가 있는 사람은 당연히 줄을 설 필요가 없고, 입장이 가능한 시간에 바로 입장하면 된다.
²사실 그 당시에는 대단한 '오지라퍼'라고도 생각했다.
³알고 보니 필하모닉 홀의 문이 열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미 건물 안 카운터 근처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우리보다 훨씬 일찍 와서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지그재그로 줄을 서서 입구를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 건물 앞까지 줄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⁴쇼팽 콩쿠르 기간에 쇼팽 인스티튜트가(
Narodowy Instytut Fryderyka Chopina) 콩쿠르에 대한 정보를 담아 발간하는 신문이다.
# 배팅 vs 회군
쇼팽 천사님이 홀을 떠났고, 연주자 한 명의 연주가 끝날 때마다 줄의 맨 앞에 서 있던 몇 명의 사람들은 표를 손에 쥐고 안도하는 표정으로 줄을 떠났다. 하지만 추이를 보니 아침 세션의 인터미션 전 4명의 연주가 끝날 때까지도 들어가지 못할 것 같았다. 아니, 인터미션 후에도 우리 앞의 사람들이 모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파이널도 아니고, 1라운드 세 번째 날이었는데도 말이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렇게 계속 줄을 서서 표 구입에 배팅할 것인가, 멈출 것인가.'
결론은, '여기에서 멈춘다 오늘은.' 왜냐하면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날은, 본선에 진출한 한국의 피아니스트 세 분의 연주가 있는 다음 날 아침 세션이었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오늘'은 필하모닉 홀의 현장 구매 분위기를 정탐한 것으로 만족하고, '내일'은 필사의 각오로 직관 표를 꼭 쟁취하기로 한다.
오늘은, '내일'을 위해 이만 회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