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전의 날, 꿈이 이루어졌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 결전의 날
드디어 결전의 날이다. 쇼팽 콩쿠르 직관 표 구하기에 실패한 '어제'가 반복되도록 할 순 없다. 전날 의도치 않게 필하모닉 홀을 정탐한 결과를 충실하게 피드백하여 '오늘(10월 6일 월요일)'은 절대 실패할 수 없었다. 성공의 열쇠는 당연히 단 하나, 전날보다 훨씬 훨씬 훨씬 일찍 가서 줄을 서는 것뿐이었다.
전날 미리 사놓은 샌드위치로 아침을 챙겨 먹고 7시 30분쯤 숙소를 나섰다. 직관 취소표(빈자리) 판매 시작 시간으로부터 거의 2시간 전에 필하모닉 홀에 도착하기 때문에 우리가 줄의 거의 제일 앞에 설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더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어제 한 번 와봤다고 한결 더 익숙한 느낌으로 필하모닉 홀에 도착했다. 아침 7시 50분경이었다.
예상은 예상일 뿐이다. 대체 이분들은 몇 시에 나오신 걸까.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줄의 제일 앞에 설 수 있겠다는 기대감은 바로 접었지만 그래도, '오늘은 드디어 들어갈 수는 있겠다'는 차선의 기대감이 피어났다. 아침 세션의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순서가 우리나라 본선 진출 피아니스트 세 분의 무대니까 첫 번째 연주자 연주 후 문이 열릴 때까지만 입장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판매 카운터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오랫동안 바라던 것이 곧 손에 닿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쿵-쾅-쿵-쾅 크게 뛰기 시작했다. 우리 앞의 사람들이 모두 홀로 향하는 계단에 올랐고, 드-디-어 우리는 거의 세 시간의 기다림 끝에 쇼팽 콩쿠르 1라운드 직관 표를 손에 쥐었다.
얼마나 오르고 싶었던 계단이었나. 겹겹이 늘어선 줄 너머로 보이던 계단을 올라 표를 확인받고 간단한 검문을 거친 뒤 직원이 건넨 한 마디, "Enjoy!"를 들으니 심장 박동이 한결 더 빨라지는 느낌이었다. 콩쿠르 각 라운드 결과 발표 등을 비롯해서 메인 프레스홀이 되는 중앙홀을 지나고 또 계단을 올라 콘서트홀 1층 문 앞까지 도착했다. 첫 번째 연주자 연주가 한창이었다. 그분의 연주가 끝난 후 그리고 피아니스트 이효님 연주가 시작되기 전 그 사이에 들어가서 비어있는 자리 중 아무 곳이나 재빨리 찾아 앉으면 되었다.
# 꿈이 이루어졌다
문이 열렸다. 어디에 빈자리가 있는지 재빠르게 스캔했다. 2층 좌석이 머리 위에 얹어지는 부분에 자리가 있었다. 날렵하게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니 사회자가 다음 참가자 이효님과 이효님의 프로그램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지금 앉아있는 곳이 쇼팽 콩쿠르 본선이 열리는 바르샤바 필하모닉 콘서트홀이라는 것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피아니스트 이효님 등장. 연주자들이 피아노 의자에 착석해서 숨을 고르는 동안에는 객석에서도 숨을 고르는 느낌이었다. 이효님은 녹턴, 발라드, 왈츠, 에튜드 순서로 연주했다. 특히 발라드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발라드 2번을 연주해서 더 기쁜 마음으로 응원하며 들었다. 코다를 향해 빌드업하는 코다 직전 부분의 에너지가 인상적이었고, 폭풍같이 쏟아붓고 담담하게 마무리하는 연주가 정말 좋았다. 또한 왈츠(Op.18)의 재기 발랄하고 사랑스러운 느낌을 잘 표현해서 왈츠가 평소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멋있는 작품이라고 느꼈다. '왈츠의 왕자님'이라는 별명을 붙여드리고 싶다.
이효님 연주가 끝나 있는 힘껏 박수를 치고, 사회자의 소개 끝에 피아니스트 이혁님이 무대에 올랐다. 이혁님은 지난 제18회 쇼팽 콩쿠르에서도 사려 깊은 연주를 보여주어 많이 응원했었고, 롱티보 콩쿠르 우승 후에 다양한 연주 기회를 많이 얻는 것 같아서 정말 잘됐다고 생각하면서 응원해 왔다. 이번 1라운드 무대에서는 판타지, 녹턴, 왈츠, 에튜드 순서로 연주했는데, 특히 누구나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쓸쓸함을 툭- 건드리는 것 같은 녹턴(Op.62 No.1) 연주가 인상적이었다. 이전까지 자주 듣는 쇼팽 작품 목록에 녹턴은 없었는데, 이혁님 연주와 이번 콩쿠르 직관을 계기로 녹턴을 즐겨 듣고 있다.
다음은 우리의 귀인, 피아니스트 이관욱님이 무대에 오를 차례였다. 전날 거리에서 우연히 봤다는 이유만으로도 내적 친밀감이 충만해져 우리의 응원을 모두 에너지로 받으시고 부디 끝까지 힘내주시길 열심히 응원했다. 이관욱님은 녹턴, 에튜드, 바르카롤, 왈츠 순서로 연주했다. 바르카롤은 이후 쇼팽 콩쿠르의 모든 연주들 중에서도 가히 베스트 오브 베스트 연주로 뽑힐만한 연주라고 생각한다. 물이 잔잔하게 파동을 일으키며 넘실대듯, 과장 없이 차분하고 부드럽게 나아가는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있어서 정말 황홀했다. 이관욱님 덕분에 이 작품이 왜 '뱃노래'인지 알게 되었다. 절제미와 우아함을 겸비한 왈츠(Op.42) 연주도 정말 아름다워서 콩쿠르 후 가장 즐겨 듣는 왈츠가 되었다.
이관욱님의 연주가 끝나고 아침 세션의 인터미션이 되었다. 화장실을 다녀오거나 스트레칭을 하면서 콘서트홀을 둘러보거나 콘서트홀 문 밖에 있는 쇼팽 콩쿠르 굿즈샵을 구경할 수 있었다. 화장실과 굿즈샵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보여서 포기하고, 피아노를 조율하는 무대 쪽도 보고 사진도 찍다가 콘서트홀 문 밖의 로비로 나가보았다. 그런데 이럴 수가! 연주를 끝낸 이혁님, 이효님 형제가 폴란드 언론 인터뷰¹에 응하고 있었다. 물론 그 주위에는 다양한 국적의 많은 팬들이 있었고, 접근하기는커녕 멀치감치 떨어져서 보는 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팬들이 형제 피아니스트들에게 달려들어 건네는 것은 프로그램북과 펜이었다. 프로그램북을 사지 않았던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프로그램북은 연주자와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만 사는 게 아니라, 응원하고 있는 피아니스트에게 인사하고 응원의 말도 하면서 사인을 받기 위한 '사인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도 산다는 사실 말이다. 그런 걸 보면 쇼팽 콩쿠르 본선 기간에는 어디에서든 프로그램북²을 갖고 있는 편이 좋겠다. 프로그램북도 없어서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이혁님과 이효님을 멀찍이 바라만 보다 보니 어느새 인터미션이 끝나감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¹이 브라더스(Lee Brothers)는, 훌륭한 연주 실력과 더불어 겸손하면서도 친화적인 태도, 능숙한 폴란드어 구사력까지 갖춰 폴란드 현지인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고, 폴란드 공영 방송을 비롯하여 여러 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이후에 폴란드 친구들과 대화하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²그런데, 꽤 무겁다. 두꺼운 종이, 책등 폭이 2cm를 넘는 두께, 총 320쪽이다.
#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기 전까지는 쇼팽 콩쿠르 본선에 진출한 한국인 피아니스트 세 분의 연주를 직관하며 응원하는 것은 그저 로망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로망을 현실로 만든 건 머뭇거림을 내려놓기로 한 과감한 선택과 결정이었다. 앞으로도 어떤 순간에, 망설임을 이기는 선택과 결정을 하는 사람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바르샤바에 가보기로 결정했을 때는 쇼팽 콩쿠르 기간에 바르샤바에 가는 것만으로도 좋겠다고, 바르샤바에 도착했을 때는 필하모닉 홀에 가보는 것만으로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필하모닉 홀에서 직관 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섰을 때는 표를 사서 콘서트홀로 향하는 하얀 계단을 오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욕망을 점점 키우는 게 나쁜 건가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원하던 것을 이뤄갈 때마다 얻을 수 있는 기쁨과 벅찬 감동을 있는 그대로 만끽하고 표현할 수 있었던 매우 드물고 소중한 기회였으니, 바르샤바와 쇼팽 콩쿠르를 향한 모든 욕망은 괜찮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중앙홀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오면서, '나는 여기에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