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또 같이라는 사랑의 기술

누가 나를 더 사랑한다고?

by 어쩌다현모양처

남편과 점심을 먹던 어느 날, TV에서는 개그콘서트가 방영되고 있었다. 밥을 먹다 말고 자연스레 시선이 화면에 머물렀다. 개그맨들의 말장난이 의외로 재미있었다. 그러다 문득, ‘빵’ 하고 웃음이 터졌다. 키득키득. 참으려 할수록 더 새어 나오는 웃음에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순간 남편이 한마디 했다.

“그러니까 큰아이가 너를 안 놔주는 거지.”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네 리액션이 재밌잖아. 반응이 좋으니까, 놓고 싶지 않은 거야.”

나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만 하겠어?”

그랬다. 아이도, 남편도 결국 나의 반응이 좋아 나를 좋아한 것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잘 웃어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연다. 특별한 진리가 아니다.
돌아보면,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매력 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함께 있으면 편안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런 내가 우리 집에서 ‘인기녀’가 되다니, 가끔은 웃기기도 하다. 나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언제나 고맙다. 그러나 넘치는 사랑은 때때로 갑갑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애정과 관심이 통제로 바뀌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남편은 나의 외출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 이는 곧, 나 스스로를 위한 시간과 공간이 제한된다는 의미다.
가끔은 잠깐의 산책, 커피 한 잔,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대화가 간절하다.
그런 일상이 주는 환기는 내 삶을 다시 숨 쉬게 해 준다.

다행히도 남편이 반대하지 못하는 외출이 하나 있다.
동생들과 조카들과 함께 떠나는 캠핑이다.
쉽게 허락을 받진 못하지만, 또 마땅히 거절도 하지 못하는 여행.

그러나 남편은 여전히 말린다.
“굳이 고생하러 가야 하냐”
“텐트는 어떻게 치냐”
“왜 사서 고생이냐”


하지만 나는 말한다.
“고생스럽지 않아. 오히려 그 시간이 참 좋아.”

사실 남편은 나를 통해 가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는 중이고, 실은 혼자 남겨지는 것이 싫다는 걸, 나도 안다. 그럼에도 나는 1년에 두 번, 3박 4일의 캠핑을 떠난다. 처음 이틀은 자매들의 시간이자 엄마와 맘껏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의 시간이고, 주말이 되면 남편과 제부들이 합류하며, 모두 함께의 시간을 보낸다. 제부들은 홀로 남겨지는 시간이 꽤 만족스러운 듯하다. 잠깐이라도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나의 남편만은 예외다.

가끔 묻는다.
“남편이 싫어하는데, 왜 굳이 하려 해?”

나는 말할 수 있다. 더 건강한 관계를 위해선 ‘따로 또 같이’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부모자식 관계가 어려운 건 늘 함께 붙어 있기 때문이다. 쉴 틈 없는 애정은 결국 간섭이 되고, 간섭은 관계에 금이 가도록 한다. 서로의 숨을 위한 틈, 그 작은 간격이 삶의 질을 바꾼다.

나는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다. 가족을 위해 쓰는 에너지 못지않게, 나에게 쓰는 에너지도 소중하다.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있어야, 가족들에게도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 내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것은 에너지의 순환이고, 내 역량의 지표도 에너지의 순환이다.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낸 날, 나는 다르다. 아이들에게도, 남편에게도, 집안일에도 더 여유롭고 온화해진다. 그렇지 못한 날엔 내 안의 에너지가 정체되어, 그저 멍~해진다. 마치 머릿속이 안개로 가득 찬 것처럼.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내가 힘든 이유는 ‘주도권’의 유무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이 일이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인지, 누군가에 의해 끌려가고 있는 일인지. 그 차이는 삶을 지탱하는 힘의 차이로 이어진다는 것을 말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땐, 엄마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가까울수록 관심은 간섭이 되고, 애정은 부담이 된다. 이제는 덜어내야 할 시기. 함께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깊이 함께하기 위해서. 서로의 공간을 갖고, 아쉬울 만큼만 함께 있는 것. 그게 진짜 ‘우리’가 되는 길이다.

나는 어린 시절 아홉 식구 속에서 자랐다. 튼튼한 어른들의 울타리 속에서, 나는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법을 배웠다. 수없이 실패하고, 때로는 성공하며 자라난 나는 능동적인 사람으로 컸다. 결혼 전까지는 그랬다. 결혼 후, 나는 내 모습을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다. 나의 그런 모습을 사랑했던 남편은, 결혼 후에는 나의 모든 에너지가 자신에게 집중되길 바랐다. 퇴근 후, 내가 집에 없다는 사실에 짜증이 쓰나미처럼 밀려온다는 남편. 나는 수없이 대항했고, 싸웠다. 그러나 결국 멈추었다. 우리의 싸움 아래에는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디더라도, 멀리 돌아가더라도, 나는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길 위의 나그네 옷을 벗긴 것은 거센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살이었으니까.







오늘의 나의 참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런 장면을 자주 본다.
배우자의 통제는 싫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배우자에게 하는 통제는 사랑이라고 여기는 사람들.

사람 사이에서 가장 어려운 관계는 아마 부모자식, 그리고 부부일 것이다. 이 관계들이 유독 어려운 이유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감춰진 통제가 깔려 있기 때문은 아닐까. ‘눈치껏 해주길 바라고, 알아서 해주길 바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길 바라는 기대는 관계를 쉽게 상처 입힌다.

우리는 늘 역지사지의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누군가를 험담하기 전에, 누군가를 비난하기 전에, 나는 과연 그보다 나은 사람인지 돌아봐야 한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그 말 한마디에 왜 그렇게 상처를 받아?”
그러나 정작 본인이 그 말을 듣게 되면 사흘을 잠 못 이루기도 한다.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어렵다. 그래서 말없이 멀어지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다. 공감이 어려운 날엔 그냥 들어만 줘도 된다. 묵묵히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신뢰는 쌓인다. 그 작은 태도가, 오래가는 관계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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