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으로부터 이승우로
‘쓰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주제에 이 책을 포함시킬 수 있을까, 하고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을 몇 권 꺼냈습니다. 바닥에 쌓아놓고 주저앉아 하나하나 검토하기 시작했지요. 만약 책상으로 가지고 가 앉았다면 마음이 꼿꼿해질 것이라 검토가 안 될 것이라 그냥 책더미 옆에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소설가의 귓속말>의 표지는 무광이라 마음에 들었지만 표면에 초를 칠한 듯 책을 만지면 뭐가 묻은 것 같아 자꾸 손가락을 비비게 되었습니다. 쩍쩍 달라붙는 질감이 한 번 잡으면 억지로 잡혀있어야 할 것 같은 약간의 불쾌감이 이는 표지. 소설가 이승우의 이름에 본격적으로 관심이 쏠리기 시작한 데는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있습니다. 과거 [빨간 책방]이라는 팟캐스트에서 이동진은 이승우 작가를 자주 언급했습니다. 나는 언제나 이런 식입니다. 이동진을 좋아하는데 이동진이 좋아하는 이승우를 따라 좋아하고. 누군가에게 혹은 뭔가에 관심을 갖게 되는 시작점에는 언제나 그를(혹은 그것을) 좋아하는 누군가의 추천이 있습니다. 추천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내가 느끼는 것은,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얘기하는 사람의 사랑이 그것을 보는 내게도 사랑을 이끌어내는 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추천이란 그렇게 의도하지 않아도 흘러내려가는 사랑 같은 게 아닌가 그렇게요. 그러니까 이동진은 자신이 얼마나 이승우의 작품을 좋아하는지 지치지도 않고 떠들었을 뿐이고 나는 거기에 감화된 것입니다. 그렇게 이승우의 책을 한두 권 갖게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는 있지만 정말 좋아하게 될지는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단언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리고 나도 좋아하게 되는 경우는 절반의 확률이라고 보면 대충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승우의 책에 관심을 갖게는 되었지만 이는 이승우를 좋아하는 이동진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이승우를 말하고 있는 이동진을 더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닐까. 어찌 된 곡절이든 지금 내 앞에는 이승우의 <소설가의 귓속말>이 있습니다. ‘쓰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주제에 맞을지 살펴봐야 합니다.
이동진은(또! 흐흐) 서점 가서 책을 고를 때 책의 2/3 지점쯤을 펼치고 한두 페이지 읽어본다고 하였습니다. 추천을 받은 것도 아니고 아무런 정보도 없이 손에 든 책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할 때 그런 방법을 쓰면 웬만하면 실패하지 않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보통의 책은 2/3 지점쯤 가면 힘이 떨어지는 게 보통이고(사람의 일이니까요) 그 지점에서도 재미와 밀도가 떨어지지 않는 책이라면 살 만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저도 그쯤을 펼쳐보았습니다. <소설가의 귓속말>은 26 꼭지가 들어있는 산문집이라 글제목도 훑었습니다. 스무 번째 글은 제목이 ‘소설 속에는 소설가가 있다’였습니다. 그 글을 먼저 읽었습니다. 끌리는 다른 제목들, ‘~체하기’와 혼잣말, 쓸 수 있는 글, 나는 나 외에 아무도 대표하지 않는다, 푸네스처럼 새롭게, 번역되지 않는 것들, 이 있었습니다. 내 관심이 어디 있는지 숨길 수가 없는 제목들만 뽑혔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아직도’ 나네요. 보르헤스의 픽션들 중 하나의 주인공인 푸네스는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입니다.(내 기억이 맞다면요) 기억력이 좋으면 좋은 줄만 알고 있다가 모든 것을 기억하면 한 발짝도 움직이기 어렵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 무서운 소설이었는데 이승우는 어떤 이야기를 썼을까요, ‘번역되지 않는 것들’... 동네 주민센터에서 두 달 전부터 일본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자기 모국어를 버리고(?) 다른 언어로 잘 배워도 어눌할 그 언어로 작품을 쓰는 작가들에 흥미를 갖고 있습니다. 다와다 요코나 줌파 라히리 같은 작가.
‘소설 속에는 소설가가 있다’에는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의 쓰기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하는 식으로 틈만 있으면 문장의 틈을 파고든다. 그는 에밀 아자르와 또 다른 이름 뒤에 숨은 적이 있지만 작품 속에서는 숨는 것을 참지 못한다. 아니, 필명을 쓴 것 역시 실은 숨는 것을 참지 못하는 그의 성격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고 할 것이다.”(p.178)
이승우 작가는 역설 파헤치기 명수입니다. 필명을 쓰는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가 보다 하는 보통의 생각을 실은 드러내고 싶은 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알아냅니다. 만약 내가 로맹가리 혹은 에밀 아자르라면 엄청 창피할 것 같은 그런 폭로. 그렇다면 이승우는 이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신을 숨기는’ 태도를 비난하는 것일까요? 나라면 그렇게 밖에 결말을 쓸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그런 점이 그의 소설을 한 편의 에세이로 읽게도 하는데, 예컨대 그는 에세이를 잘 쓸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다. 소설이 ‘그’의 문장이라면, 에세이는 ‘나’의 문장이다. 로맹 가리의 소설들은 ‘나’의 문장으로 쓰였다. ‘그’의 문장에서는 꾸밈과 구조가 중요하지만 ‘나’의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이다. 즉 내부에 있는 것의 표출이다. 그는, 내가 보기에, 그럴듯한 이야기의 모양을 만들고 꾸미는 데 쓸 시간을 조금 빼서 자기 생각을 피력하는 데 쓴다. 혹은 그러는 척하지는 지도 모르겠다. 꾸며낸 것은, 꾸며냈기 때문에 반듯하다. 그는 그런 흔적을 겸연쩍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진실은 질서 정연하거나 일목요연하게 표현되기가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는 표시이다.”(p.179)
이승우는 역설을 파헤쳐서 뿌듯해하는 것으로 글을 끝내는 법이 없습니다. 그 역설을 취하는 그 마음을 다시 해체합니다. 로맹 가리의 소설은 수필 같다, 소설과 수필의 차이점은 무엇이고, 그래서 그의 소설이 수필 같은 것이고 수필의 목표는 ‘나’의 ‘진실’을 쓰는 것이기에 그의 소설에는 소설가가 많이 들어있고, 그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데 ‘진실’이라는 건 소설의 꾸밈과 구조라는 질서 정연한 형식으로는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식으로 끝없이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은 설명을 죽~~~. 이승우 글의 집요함이자 지겨움이자 탁월함이자 진지함이자 이승우의 소설에는 이런 식으로 이승우가 많이 들어있습니다. 이승우가 ‘그’의 문장으로 소설을 쓰는 이유는 ‘나’를 드러내지 않고 ‘진실’ 말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꾸며냈기 때문에 반듯’한 소설을 쓰면서 그런 ‘나’그리고 나의 ‘진실’보다 ‘그’를 내세워 좀 더 보편적인 ‘진실’을 만들려는 더 큰 욕망을 품은 작가일까요?
‘글 쓰는 마음’이라는 주제에 <소설가의 귓속말>을 후보로 넣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승우 작가의 끝없이 이어지는 인과의 글 숲을 통과하기를 즐거워할 수 있는 참여자가 많으면 좋을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