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니 Sep 28. 2021

식덕생활의 조력자들

1.5평 방구석식덕생활


작년, 여름이 되기 전의 일이다. 윤이 작은 화분 하나를 사들고 들어왔다. 테이블야자다. 살 때 꽃집 주인에게 들은 이름이라고 알려주었는데 자꾸 잊어먹고 다시 검색하고 그렇게 해서야 한 번 불리는 이름. 이 글을 쓰려고 또 검색을 했다. 이 작은 테이블야자는 우리 집에 들어올 때부터 윤이 외쳤던 '미옥이'다. 테이블야자 일반에서 미옥이는 특별한 테이블야자가 되었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알려진 시처럼 "내게로 와서 꽃이" 되는 일이다. 때때로 윤이 "우리 미옥이~~ 자리쩌쩌?'라며 쓰다듬는 눈길로 불러서인지 미옥이는 점점 친근해졌다.


미옥이가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개의 화분이 더해졌다. 코로나19로 테이크아웃만 허가되기 이전 '커피 빈'에 앉아 책을 읽고 있을 때, 가방에 작은 화분들을 가득 넣은 여자가 다가왔다. 키가 삐죽 크고 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꽃집을 차리겠다는 자신의 꿈을 또랑또랑하게 말하던 여자, 그에게서 산 것이다. 역시 들었으나 잊은 두 식물의 이름은 검색으로도 딱 일치하는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미옥이 다음에 우리 집에 왔으므로 동옥이와 삼옥이가 되었다. 돌림자 옥으로 윤이 붙여 주었다. 너무 성의 없이 후루룩 지었나 싶어 미안했지만 미옥이 동생들로 인정한 것이니 두 식물에게 이해를 구할 따름이다. 그렇게 식물 식구 세 자매가 되었다. 왠지 집에서 키우는 식물은 여성으로 느껴진다.


성탄절 즈음에는 포인세티아 화분 두 개가 또 생겼다. 우리 집 건물 주가 집집마다 명절 인사차 돌린 화분이다.(보기 드문 건물주다!) 빨간 꽃이 핀 포인세티아, 꽃인지 잎이 변해 빨개진 건지, 왠지 윤은 얘들에게는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든다며.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이름이 있든 없든 일단 우리 집 문턱을 넘어 들어온 식물들은 곰돌이나 인형처럼 취급되진 않았다. 몇 년을 구석에 처박아두고 잊어도, 먼지는 쌓일지언정 변함없이 그대로인 게 인형들이라면 자의로든 타의로든 다섯이나 되는 화분 식구들은 가만있지 않았다. 변 했 다. 미옥이는 자주 새 잎대를 올렸다. 동옥이는 연둣빛의 작고 동그란 잎을, 삼옥이는 애기 손바닥 같은 새 잎을 만들어 내놓았다.


미옥이의 길쭉길쭉한 이파리들 중 두세 개의 끄트머리가 갈변되면서 자꾸 내 눈을 잡아끌었는데 마치 '날 좀 어떻게 해줘야 하지 않겠어?' 하며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딱히 식물에 관심이 없었을 때라 심드렁하게 화분 속에 손가락을 찔러보기도 했다. 물이 부족한가? 그러다가 진짜 흙이 푸석푸석 말라있기라도 하면 괜히 미안해졌다. 변한다는 건 살아있는 거니까, 살아있는 걸 안 돌볼 수는 없으니까. 


식물 관련 책을 읽게 될 거라곤 상상도 안 했는데 급기야 『아무튼, 식물』 같은 책을 넘기고 있었다. 음악 하는 작가 임이랑이 썼는데, 이 사람의 작은 집은 사설 식물원인가 싶었다. 작가의 집에 식물을 들인 게 아니라 식물들이 주인인 곳에 작가가 끼어 사는가 할 만큼 집에서 식물들이 차지한 공간은 작가가 사용하는 공간의 족히 몇 배는 되는 듯했다.(추측이다)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 생각했을 때 시작해서 큰 위로를 얻었던 실내가드닝이 지금은 작가의 삶 절반을 훨씬 넘는 의미가 되었다고 했던 책. 


사람들이 불멍으로 무아지경에 빠진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식물멍으로 그리될 수 있는 사람도 있다니, 적당히 비가 내려주면 기쁘고, 갑작스러운 소낙비에는 빨래 젖을까 뛰쳐 들어가는 사람처럼 허둥대고, 장맛비처럼 비가 너무 온다 싶으면 테라스에 있던 식물들을 집 안으로 이사시키느라 땀을 흘리고. 그 수고로움을 제 식구(그것도 아주 대식구) 챙기는 것으로 여겨 흡족해하는 사람이라니. 그 마음자리가 궁금했다. 


내 식덕 생활의 시작은 그렇게 천천히 준비되고 있었다. 거기에는 내 의지보다 주변의 많은 조력자들의 탓이 크다. 

작가의 이전글 마음이 없어 콘셉트마저도 유지되지 않는 곳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