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을 중심으로 한 손그림을 신나게 그려가고 있던 즈음 마음에 드는 그림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감탄하며 다양한 그림들을 모아가던 어느 날 뭔가 신기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어? 이거 뭐지?
굉장히 복잡한 거리 풍경인데 복잡한 듯 보이면서도 모두 큰 흐름 안에 그룹으로 연결되어 있고 건물을 그려도 사람을 그려도 상세히 묘사가 되어 있지 않고 단순화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그림의 느낌도 매우 경쾌했습니다. 최소한의 표현으로 최대를 표현하는 듯한 그런 느낌이랄까요? 마침 위드로 주차 주제로 '좋아하는 그림 모작하기'가 나와서 눈여겨보고 있었던 알바로 카스타그넷(Alvaro Castagnet)님의 그림을 모작해봤는데 전혀 감을 못 잡겠더라고요.
[알바로 카스타그넷 그림 모작 - 2017.08.21]
그리기 전에는 단순화되어서 상세히 그리는 것보다 심플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왠 걸요. 정 반대였습니다. 차라리 상세한 묘사는 보이는 그대로를 최대한 시간을 들여 그릴 수 있었는데 그룹화, 단순화는 그저 넘사벽이더라고요. 일말의 힌트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도무지 어떻게 그룹화하는 건지, 그리고 왜 그룹화와 함께 단순화도 이루어지는지 아무것도 모르겠더라고요. 몇 년간 그림을 그려 오면서도 이는 풀리지 않는 과제였습니다. 그런데 마이클 솔로브예브(Michael Solovyev) 선생님과의 첫 수업에서 오브젝트가 아닌 빛과 어두움에 집중할 때 이로 인한 그룹화와 단순화가 가능하다는 설명을 듣고 눈이 번쩍 띄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그간 모아 왔던 그림들을 보고 또 봤는데 정말이었습니다! 빛과 어두움으로 그룹화, 단순화한 증거들을 수많은 그림에서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은 왜 이 부분이 전혀 보이지 않았는지... 관점 하나만 바뀌었는데 몇 년 동안 이해가 되지 않던 부분이 이해되는 것을 보고(물론 이를 표현하는 것은 또 연습이 필요하겠지만요.) 고정관념을 걷어내는 작업이 그림에 있어서도 정말 중요한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다양한 그림분야의 수많은 마스터님들이 그분들의 책들과 워크샵에서 그룹화와 단순화를 매우 강조하는 것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럼 '그룹화'와 '단순화'를 왜 그토록 많은 마스터님들이 강조할까요? 제가 감상자의 입장에서, 또 실제로 그림을 그리면서 경험한 이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그림이 산만해지지 않는다.
2. 그림에 확실한 흐름과 리듬이 생긴다.
3. 사진이 아니라 우리 눈이 관찰하는 방식과 유사하여 자연스럽다.
4. 감상자가 그림에 더욱 깊이 참여할 수 있다.
5. 투명 수채화의 경우 터치가 적을수록 좋은데 이를 위해서도 적합하다.
6. 그룹화된 곳의 표현에 대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한 예를 만들어 봤습니다. 밑의 이미지는 다양한 오브젝트들을 겹쳐 배경을 만들었고 2명의 인물을 배치해본모습입니다. 실제의 그림에서 이렇게 복잡하게 오브젝트들이 얽혀 있다면 상당히 산만하겠죠? 극 사실주의 그림을 그리는 경우를 제외하고 눈 앞에 보이는 건물들이 많다고 이를 모두 상세히 표현한다면 이와 비슷한 상황이 될 것입니다.
위의 이미지의 배경 부분을 실루엣만 남기고 모두 통합한 모습을 만들어 봤습니다. 위의 경우 인물을 제외하고 겹친 오브젝트가 만들어내는 면의 수는 총 27개입니다. 밑의 경우는 단 하나이죠.
또한 첫 번째 이미지의 경우 인물에 초점이 잘 맞춰지지 않습니다. 두 인물 간의 거리가 보여주는 감정의 어색함을 표현하고자 한다고 했을 때 감상하시는 분들이 복잡한 배경에 시선을 빼앗겨 이들의 감정에 신경을 쓸 여지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두 번째의 경우 배경이 단순화됨으로 주인공인 인물들에 몰입도가 올라가 이들이 어떤 상태인지를 신경 쓸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다수의 인물들의 경우도 살펴보시겠습니다. 우선 눈높이를 모두 맞춰주고 원근에 따른 인물들을 배치합니다. 눈높이를 맞추는 이유는 기억나시죠? 혹시 잘 기억나지 않으시는 분들은 지난 투시 관련 글을 참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군중을 포함한 다수의 인물들을 그리는 경우도 이렇게 개별 인물을 모두 표현할 경우 이 중 누구에게 초점을 맞춰야 하는지 분명하지 않고 여러 인물들로 시선이 분산되어 산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주요 인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실루엣만 표현한 후 통합을 한다면 인물 수만큼 다양했던 면이 단순하게 통합되며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드러내기가 쉽고 분명해집니다.
이 인물들을 거리 풍경에 적용해보겠습니다. 오브젝트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면들이 생깁니다. 각각의 오브젝트가 '날 좀 봐요!'하고 외치는 느낌이죠.
이를 최대한 그룹화하면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선의 흐름과 리듬이 생기는 것도 느껴지시나요? 실제의 그림에서는 큰 면으로 통합되더라도 그 큰 면안에 여러 컬러와 다양한 효과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큰 면으로 그룹화되어 인식하기에 시선에 턱턱 걸리는 부분이 최소화되게 됩니다. 실제로 우리의 눈이 보는 방식도 디테일한 모든 부분을 보기는 보되 인식하는 영역은 우리가 주목하여 보는 영역입니다. 하지만 사진은 다르죠. 고해상도 사진은 우리가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지 인식조차 못한 작은 간판의 전화번호도 보여줄 것입니다. 이들을 모두 그림에 포함한다면 시원한 고속도로와 같은 시선의 흐름을 만드는 것이 아닌 방지턱으로 도배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리고 통합된 건물의 실루엣이 혹시 동물이나 자동차로 보이시나요? 복잡한 건문들이 하나의 면, 그룹으로 통합되었음에도 그 형태는 실루엣으로만 남아 있음에도 분명 건물군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감상하는 우리가 우리의 경험을 토대로 인물과의 관계를 고려했을 때 이 형태를 거리의 건물군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그림을 그리는 사람과 감상하는 분들 간의 일종의 게임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는 동안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고 힌트와 단서들을 주면 경험을 토대로 그림을 감상하시는 분들이 본인만의 해석으로 그림을 완성하는 적극적인 참여가 이루어지는 것이죠. 상호 간의 매우 흥미로운 커뮤니케이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사소통도 힌트에 공감을 하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룹화 단순화는 분명 이루어졌는데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친절한 힌트들을 지워버리고 이 정도는 알아서 따라오라는 식으로 이해를 강요하는 경우를 만들 수 있습니다. 위의 거리의 그룹화에서 인물들을 모두 지우고 건물군만 실루엣으로 남겨 봤습니다.
무엇으로 보이시나요? 1점 투시라는 힌트 요소가 있고 각이 졌다는 것 외에 고개를 끄덕일만한 공감을 줄 수 있는 어떠한 힌트도 없습니다. 인물들을 배재함으로 공간에 대한 친절한 힌트를 배재한 결과입니다. 추상화를 목표로 하지 않는 한 그룹화 단순화에는 공감을 충분히 불러일으켜 감상자가 기분 좋게 자신의 이해를 넣어 그림을 완성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 오히려 소통이 아닌 불통의 역효과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최대한 쉽게 수긍할 수 있는 그룹화, 단순화의 근거를 넣어야 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근거가 바로 빛과 어두움에 의한 그룹화, 단순화인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살아오는 동안 너무나 확실하게 경험해오고 있는 그룹화 이거든요.
밑의 사진에서 좌측의 나무군을 보시면 어둠에 의해 상단부의 실루엣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룹화되었죠?
아래의 두 사진도 어떤 오브젝트인지에 상관없이 모두 어두움과 그림자에 의한 그룹화가 나타납니다. 역광일수록 어두움의 면적이 크기에 그룹화되는 범위도 크게 되고요.
그래서 그룹화, 단순화에 의한 장점들을 활용하되 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빛과 어두움을 중심으로 그룹화, 단순화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실제로 익히 경험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면을 꼭 블랙으로 만들며 그룹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빛과 어두움의 큰 그룹으로 나누되 그 안에서 다양한 색과 효과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음의 그림들은 제가 빛과 어두움에 의한 그룹화 단순화에 집중하며 그려본 그림들입니다.
빛과 어둠이라는 아주 신뢰할 만한 근거가 있고, 인물이나 기타 요소들을 통해 친절한 힌트들을 더해간다면 산만하지 않고, 리듬과 흐름이 있는, 우리가 관찰하는 양식과도 유사하며, 적극적인 소통의 즐거움도 얻고, 표현의 자유도 얻는, 게다가 수채화의 경우 덧칠과 붓칠을 획기적으로 줄여 투명함을 유지할 수 있는 1석 6조의 효과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번 글을 통해 그룹화 단순화에 대한 어떤 실마리를 얻으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