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크러진 시간은 잼으로 만들면 된다’ -안희연, <슈톨렌>중
"선생님, 혹시 브런치에 글 쓰세요?"
독자님을 만났다. 수업 때 들었던 시를 찾아보다가, 시가 담겨 있는 브런치 글을 읽었는데, 수업 내용이 같아서 놀랐다는 거다. "어머, 읽었어?" 독서동아리에서도 만나는 하늘이(가명)다. 동아리 시간에도 책 이야기, 작가 이야기를 하며 눈빛을 반짝여서 수업할 때마다 나를 기운 나게 하던 아이다. 이름이 프랑스어 단어라서 그 얘기를 해주었더니 너무 신기해하던 하늘이가, 내 글을 알아봐 주어서 기뻤다.
작은 학교에서 근무할 때에는 학생들과의 교류가 잦았다. 그때의 내 위치가 (물론 교무실의 위치가 교실 한가운데에 있기도 했고) 학년부장으로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일주일에 네 시간씩 국어수업을 하다 보면 모르는 아이가 거의 없었다. 이번 학교에서는 일주일에 두 시간 수업에 삼백 명이 조금 안 되는 학생들을 만나다 보니, (게다가 비담임으로서 본부 교무실에 학년과 떨어져 지내다 보니)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학생들이 많지 않다. 쉬는 시간이 5분이고, 점심시간도 학급활동으로 자유롭지 않아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더 그런 것 같다.
하늘이는 국어시간마다 수업 일기를 구체적으로 적어내는 학생인데, 동아리 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활동을 하는 내내 내가 의도한 대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진솔하게 표현해내는 아이여서 자꾸만 발표를 시키게 된다. 작가탐구반의 첫 수업에서 함께 이야기해 보고 싶은 작가의 이름에 헤르만 헤세를 적어 낸 걸 잊지 않고 2학기에 헤세의 <데미안>을 함께 읽었다. 나 또한 헤르만 헤세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김신지 작가의 <기록하기로 했습니다>를 통해 기록과 글쓰기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서, 꼭 일기가 아니어도 괜찮으니 무언가 하나를 기록하자고 한 내 이야기를 실천하는 학생은 하늘이가 유일한 것 같다. 줌으로 했던 실시간 독서동아리 시간에 <날마다 구름 한 점>이라는 (책읽아웃에 소개되어 내적 친밀감이 느껴지는) 책을 읽는 하늘이를 보는 게 기뻤고, 자신이 찍은 구름 사진이라며 원격수업할 때 줌 배경화면으로 뽀얀 구름 사진을 띄워놓은 아이를 볼 때마다 왠지 뿌듯했다. 넉살이 좋아서 유쾌하게 대화를 나누는 다른 학생들과의 대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하늘이와 나 사이의 대화에는 책이 있다는 점일 것이다.
언젠가 쉬는 시간에 즐거운 대화를 나눈 끝에, “나는 하늘이랑 얘기하는 게 좋아.”라고 했더니 “저도요.”라 답해준 하늘이가 오늘은 수업을 마치자마자 내게 말을 건넸다. 아니 시를 추천해주었다. 마침 오늘의 책(기말고사를 마치고 일주일에 한 권씩 책을 소개하고 있다.)으로 유희경 시인의 <세상 어딘가에 하나쯤>을 소개하던 차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시집 서점 ‘위트앤시니컬’을 소개하고, '책읽아웃' 채널예스 영상을 통해 서점지기의 일상, 시 낭독회의 좋은 점, 매력적인 사람이고 싶다는 시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시인의 책을 추천하고 시를 추천받다니! <슈톨렌>이라는 시를 읽었는데 읽다 보니 좋아서 선생님께 얘기하고 싶었단다. “슈톨렌은 빵 이름인데?”라고 했더니 맞다면서 시의 마지막에는 ‘물크러진 시간을 오래오래 졸여 달콤한 잼으로 졸인다’는 표현이 있었다 한다. 어떻게 시의 구절을 외워서 전해주느냐고 나는 일단 놀랐는데, "물크러진 시간을?"하고 말하다 보니 그 의미가 참 좋아서 또 감탄했다. 외운 건 아니고, 의미가 좋은 것 같아서 그런 구절이었다고 기억한다는 하늘이에게 "와, 정말 좋다! 고마워, 꼭 찾아볼게." 하고 답했다. 그렇게 교실문을 나서서 교무실로 향하는데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대면하는(?) 사람에게 시를 추천받은 경험도 처음이고, 시의 한 구절을 알려주면서 그 느낌을 전해받는 것도 처음인 듯해서다.
급식지도 시간에 다시 만난 하늘이에게 "아직 못 찾아봤어" 고백하고 우리는 또 시 이야기, 아니 이번에는 빵 이야기를 했다. 슈톨렌은 독일의 크리스마스 빵이라며 크리스마스가 올 때까지 한 조각씩 잘라먹는다고. 그 맛있는 걸 어떻게 하루에 다 안 먹느냐 시시덕거리고 우리의 대화는 지나가버렸지만, 그 대화 덕분에 잊지 않고 시를 검색해볼 수 있었다. 다행스레 빵만 검색되진 않고 곧 안희연 시인의 시를 찾을 수 있었다. 과연 좋은 시였다. 시의 전문을 읽으면서, 수업 시간에 얘기하려고 했던 소설이 떠올랐다.
오늘 본 영상의 끄트머리에는 시인이 추천하는 책도 한 권 소개되었는데,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이었다. 우리말 표기법에 관한 수업으로 칠판에 한가득 판서가 되어있는 틈새에 그 책 제목과 작가를 써놓고 나도 책에 대해 한 마디 했다. 김연수 소설가가 번역한 소설집인데 꼭 읽어보라고. 그러면서 정말 좋았던,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말할까 말까 하다가 멈추었던 거다. 소개할 걸 그랬다고 시를 읽으면서 후회했다. 이 소설의 내용이 오늘 하늘이가 알려준 시 <슈톨렌>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죽음을 겪은 부부에게 자신이 구운 따듯한 롤빵을 주는 빵집 주인처럼, 달콤한 빵이 슬픔의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시라니. 나하고 하늘이하고 마음이 통한 듯한 느낌이었다.
(생략)
펑펑 울고 난 뒤엔 빵을 잘라 먹으면 되는 것
슬픔의 양에 비하면 빵은 아직 충분하다는 것
너의 입가엔 언제나 설탕이 묻어 있다
아닌 척 시치미를 떼도 내게는 눈물 자국이 보인다
물크러진 시간은 잼으로 만들면된다
약한 불에서 오래오래 기억을 졸이면 얼마든 달콤해질 수 있다
<슈톨렌> 중에서, 안희연 @2020, 창비,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슬프고도 달콤한 시 한 편을 알았다. 학생이 추천해주어서 잊지 못할 시가 될 것 같다. 어쩌면 마지막 구절을 외울 수도 있을 것 같다.
2021년 12월이다. 올해 ‘학교 옮긴 적응기’만 몇 편을 썼는가 모르겠다. 부적응기로도 읽히는 그 기억들을 졸여서 잼으로 만들어야겠다. 그때의 내 설탕으로는 하늘이와의 대화가 몇 스푼은 들어갈 거다. 수업시간에 내가 하는 이야기들을 허투루 듣지 않고 찾아보는 학생, 내가 추천한 책을 기꺼이 읽는 학생, 자신이 읽은 책을 신나게 이야기하는 학생이 내게는 무척 귀하다. 시를 추천하고, 책을 추천하는 일은 내가 늘 하는 일인데 이렇게 내가 받아보니 큰 기쁨이란 걸 알았다. 아무래도 저 시집을 두 권 사야할 것 같다. 내가 그간 한 일이, 그 마음이 누군가에게는 기쁨이 될 수도 있다니 감사한 일이다. 우리가 함께 할 시간이 더 많았음 좋겠다. 둘이서 슈톨렌의 단맛을 확인하고 싶다.